증오(Hate)

마티유 카소비츠가 이것을 찍고 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당시 나이는 이십대 후반. 내 또래였을 때. 나는 뭐 하는 놈인가. 어쨌든 이 영화는 곱씹을수록 괜찮은 영화다. 연기는 두말하면 잔소리고, 각본도 영상도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다. 비범하다는 말은 아니다. 특이해서 평범하지마는 않다는 것이다. 그냥 묻힐 영화는 아니라는 뜻.
간략한 줄거리는 이렇다. 빈민촌. 시외 지역. 못사는 동네. 시위대가 경찰서를 급습했다.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한 청년(압델)이 입원했다. 구타 고문을 당한 것이다. 다음 날 세 친구가 모인다. 빈츠, 사이드, 위베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동네를 쏘다니며 논다. 빈츠는 압델이 경찰에게 폭행당한 사실에 분노한 상황. 경찰에 복수하겠다고 설레발을 친다. 어젯밤 시위 때 경찰이 잃어버린 총을 그가 습득했다. 위베르는 총을 보고 빈츠를 말린다. 빈츠는 압델이 죽으면 곧바로 경찰에 복수하겠다고 말한다. 세 친구는 막차를 놓쳐 밤거리를 방황한다.
영화 처음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지구가 보이고 그 위로 화염병이 떨어진다. 위베르의 목소리가 나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50층에서 추락하는 남자의 얘길 들어봤는가? 밑으로 떨어지는 동안 그는 계속 중얼거린다.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아직까진 괜찮아.' 추락하는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어떻게 착륙하느냐지." 이 말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대변한다(위베르는 빈츠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면서 '우리 신세 같지?'라고 말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빈츠, 사이드, 위베르다. 넓게 해석하면 그들처럼 방황하는 젊은이들이다. 이 영화는 청춘 영화다. 청춘 영화인데 밝지 않다. 한없이 어둡다. 여기 등장하는 젊은이들은 막장까지 간 애들이다. 학교는 불타서 사라졌고 만날 몰려다니며 마약이나 하고 말썽만 부린다. 위베르의 말에서 '추락하는 남자'는 그들을 뜻한다. 그들은 추락하고 있다. 경찰과 대치하며 악감정만 키우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하겠는가? 사회로 나가 성공하겠는가? 착륙은 불 보듯 뻔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멸뿐이다. 지구 위로 떨어진 화영병은 불바다를 일으킨다. 추락하는 자에게 착륙이란 죽음이다. 이것은 그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영화 결말과 일치한다. '증오'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누구를 증오한다는 말인가? 이는 '증오'를 증오한다는 뜻이다. 증오 자체에 대한 증오다. 왜냐면 증오가 파멸을 부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젊은이는 경찰과 대적한다. 그들은 경찰에게 증오심을 품고 반격한다. 하지만 경찰을 이기지 못한다. 화를 냈다가 화를 입는 쪽은 그들이다. 위베르의 말처럼(경찰 하나 죽인다고 경찰이 없어지냐?) 바위에 계란 치기다. 그러니까 영화는 증오를 증오하면서, 증오가 불러올 파멸을 통해,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사이 좋게 지내라는 뜻이다. 왜 이런 주제를 담은 영화도 있지 않은가.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이것도 똑같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1. 세 이야기
영화에서 세 가지 얘기가 나온다. 유명인 몰래카메라 얘기, 화장실 노인이 들려준 얘기, 수녀를 배트맨으로 오해한 얘기. 줄거리와 상관없이 등장인물끼리 한 얘기지만 새겨들어야 한다. 여기에 복선과 주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말은 중요한 단서다. 말을 흘려들으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하나 곱씹어보자. 왜 저따위 얘기를 했을까.
우선 유명인 몰래카메라 얘기. 이것은 동네 꼬마가 한 얘기다. 꼬마는 빈츠에게 말한다. "몰래카메라 알아요? 이번엔 어느 유명 인사가 걸렸어요. 몰래카메라를 설치해 놓고 식당 밖에서 그를 기다렸어요. 그는 항상 같은 데서 밥을 먹거든요. 근데 그는 자길 찍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누가 숨긴 카메라를 알려줬거든요. 거울 뒤 카메라를 그도 보고 있었죠. 옆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그는 자길 속이는 제스처라 생각하고 모른 척했죠. '이쯤 되면 끝나겠지.' 하는데 계속 찍는 거예요. 뭔가 일어날 것처럼. 형도 아는 사람일 텐데. 땀까지 흘리면서 초연한 척했죠. 웨이터가 지나갈 때마다 뭔가 안 일어나나 조마조마하는데 갑자기 한 녀석이 사인을 부탁했어요. 그는 '이거구나.' 하고 머리를 굴렸어요. 그리곤 선수 친다고 그놈한테 악을 썼죠. 영문도 모르는 놈은 당연히 열 받았죠. 결국 싸움이 붙었고 몰래카메라를 찍던 사람들이 말렸죠. 병원에 실려간 사람이 누구게요?" 여기까지다. 한마디로, 유명 인사가 애먼 사람과 싸웠다는 얘기다. 꼬마는 이 얘기를 왜 했을까? 감독이 심심해서 각본에 넣었을까? 그럴 리 없다. 이것도 다 치밀한 계획이자 의도다. 이는 경찰에게 복수하겠다고 설치는 빈츠를 비꼬는 얘기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우선 유명 인사는 누구겠는가? 바로 빈츠다. 왜냐고? 빈츠는 허세가 심하다. 그는 유명해지기를 바란다. 권총 지녔다고 깝죽대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근거는 또 있다.
빈츠의 방이다. 벽에 붙은 사진을 보라. 마릴린 먼로가 보이고 그 외 스타도 보인다. 왼쪽 문에는(아래 사진) 이소룡 사진이 붙어 있다. 이 숏은 빈츠가 '유명 인사'와 관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괜히 방을 훑은 것이 아니다. 360도 회전하면서, 각종 디테일을 보여주면서, 얘기 속 '유명 인사'가 빈츠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는 납득이 안 된다고? 걱정 마시라. 또 있다. 세 친구가 월마트 집(월마트는 친구 별명이다)에 갔을 때 TV를 본다. 뉴스에서 시위 장면이 나온다. 사이드가 말한다. "데이빗이다. 어떻게 TV에 나온 거지?" 빈츠는 말한다. "나는 저쪽에 있었는데 안 찍혔잖아." 이 말을 들어보면 빈츠가 유명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재밌게도 이 장면 다음에 꼬마가 얘기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빈츠(유명 인사)와 싸운 애먼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경찰이다. 빈츠는 모든 화근이 경찰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거짓이다. 빈츠의 착각이다. 화근은 경찰이 아니라 증오다. 빈츠가 착각했기에 몰래카메라와 상관없는 애먼 경찰과 싸운 것이다. 얘기가 들어맞지 않는가. 꼬마는 마지막에 묻는다. 병원에 실려간 사람이 누구겠냐고. 빈츠는 누구냐고 묻는다. 꼬마는 말한다. "뻔하죠, 뭐." 병원에 실려간 사람은 빈츠다. 감독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관객이 못 알아챌까봐 실마리를 더 준다. 다음 장면에 암전이 뜨고 같은 장소에 앵글만 바뀐 숏이 이어진다. 빈츠는 가만있다가 꼬마에게 묻는다. "유명 인사가 누구였는데?" 푸하하. 누구기는 누구야. 너지. 꼬마가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꼬마는 아까 얘기 중에 이런 말을 했다. "형도 아는 사람일 텐데." "형도 아는 사람일 텐데." "형도 아는 사람일 텐데." 종합하면, 꼬마가 했던 얘기는 빈츠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유명 인사가 애먼 사람과 싸워서 병원에 실려갔듯이 빈츠도 경찰에게 덤벼서 봉변한다는 뜻이다.
빈츠와 위베르는 화장실에서 다툰다. 복수 여부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인다. 빈츠는 복수에 찬성하고, 위베르는 복수에 반대한다. 빈츠의 철학은 이렇다. 한쪽 뺨을 맞았다고 다른 뺨을 내밀면 뒈진다. 위베르의 철학은 이렇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둘이 티격태격하는데 한 노인이 변을 보고 나온다. 노인은 얘기를 들려준다. 노인이 뭐라고 하는지 들어보자. "너희 신을 믿니? 그건 틀린 질문이야. 신이 우리를 믿냐고 물어야지. 그룬발스키라는 친구가 있었어. 우린 시베리아로 징용을 갔지. 지금도 시베리아에 가보면 알겠지만 기차에는 가축과 사람이 뒤섞여 타. 며칠이고 얼음산만 건너가는데 인적도 없는 곳이지. 너무 추워서 바짝 붙어 있어야 돼. 당연히 똥 누기도 어렵지. 기차 위에다 쌀 수는 없으니까. 일 볼 기회는 기차가 섰을 때뿐이었어. 기차가 연료를 보충할 때 말이야. 근데 그룬발스키란 놈은 수줍어서 같이 목욕만 해도 창피해했어. 난 그걸 가지고 놀려대곤 했지. 기차만 서면 모두 뛰어내렸어. 철로에 똥을 싸야 되니까. 내가 그놈을 또 놀리니까 그놈은 똥을 누려고 멀리 갔지. 기차가 움직이자 사람들은 재빨리 올라탔어. 왜냐? 기차는 기다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놈이 말썽인 거야. 여전히 뒷풀숲에서 일을 보고 있었거든. 그때 난 허겁지겁 달려오는 놈을 봤어. 그는 손으로 바지를 잡고 있었어. 바지가 내려갈까봐. 놈은 기차를 잡으려고 했고. 난 손을 내밀었지. 그런데 닿으려고 할 때마다 바지가 내려가서 발목에 떨어지는 거야. 바지를 올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어. 하지만 손을 내밀 때마다 바지가 내려갔어. (사이드가 결말을 묻는다) 그룬발스키는 얼어 죽었어." 그룬발스키가 부끄러워하지만 않았다면 살았을 테다. 그는 수줍음 때문에 멀리서 똥을 누었다. 그러다 기차를 놓치고 얼어 죽었다. 한마디로, 체면 차리다가 뒈졌다. 체면이 문제였다. 이는 빈츠에게도 해당한다. 그가 복수하려는 이유는 체면 탓이다. 그는 압델(경찰에 폭행당한)을 알지도 못한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복수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앞서 보았듯이 빈츠는 허세가 심하다. 이 허세는 체면으로까지 이어져 그룬발스키처럼 무모한 행동을 낳았다.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복수라니? 그것은 압델을 위한 복수가 아니라 자기 체면을 위한 복수다. 노인은 빈츠와 위베르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빈츠에게 경고한 것이다. 빈츠, 너 체면 차리다가 그룬발스키처럼 뒈진다. 따지고 보면, 세 이야기 모두 빈츠에게 경고한다. 다음, 수녀를 배트맨으로 오해한 얘기를 들어보자. 이는 사이드가 빈츠에게 들려준 얘기다. 웃기게도 모두 빈츠에게 얘기하고 있다. 어쨌든. "한 술 취한 새끼가 술집에서 나와서 까만 망토를 걸친 수녀에게 갔어. 그런데 갑자기 수녀 이빨을 갈기는 거야. 그리곤 열나 계속 팼어. 5분을 실컷 패다가 멈추고선 수녀를 쳐다보며 말하는 거야. '배트맨도 별거 아니군.' 재밌지? 수녀를 배트맨으로 착각했던 거야." 앞서 두 얘기를 파악했으니 이번 얘기는 이해됐을 테다. 결국 무슨 말인가. 취객이 수녀를 배트맨으로 오해하고 때렸다는 거다. 배트맨은 정의의 사도인데 여기서 경찰을 뜻한다. 취객은 누구인가? 보나마나 빈츠다. 경찰에게 복수하려는 빈츠를, 수녀를 배트맨으로 오인한 취객에 빗댄 것이다. 취객이 때린 사람은 배트맨이 아니었다. 그는 착각했다. 빈츠도 마찬가지다. 몰래카메라 얘기에서 애먼 사람과 싸웠듯이, 이 얘기에서도 애먼 수녀를 때린 것이다. 착각한 취객과 착각한 빈츠는 동일하다. 그는 문제의 원인이 경찰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진짜 원인은 증오심인데 말이다. 그래서 애먼 사람과 싸우고, 멀리서 똥 싸다 얼어 죽고, 수녀를 배트맨인 줄 알고 때린 것이다. 세 얘기 모두 빈츠에게 경고하고 있다. 감독이 관객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고.

2. 인물 관계를 나타내는 숏
세 친구를 살펴보자. 빈츠는 유태인이고, 사이드는 아랍인이고, 위베르는 흑인이다.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다. 빈츠는 복수에 찬동하고, 사이드는 중립이고, 위베르는 복수에 반대한다. 세 인물이 역학 구도를 이루고 있다(찬성 - 중립 - 반대). 영화에 이를 상징하는 숏이 자주 등장한다. 장면을 보며 말하자.
보이는가? 사이드는 항상 두 사람 가운데 껴 있다. 중립을 뜻하는 사이드가 찬성과 반대를 뜻하는 둘을 가르고 있다. 역학 구도에 따라 인물이 배치된 것이다. 이는 빈츠가 총을 소지하면서 심화된다. 처음에는 이런 배치가 안 나오는데 권총 때문에 둘(빈츠와 위베르)이 다투면서 저런 배치가 형성된다. 세 사람의 위치는 고정적이다. 열 번째 장면은 빈츠와 위베르가 대화하는 장면인데, 여기서 둘은 조금 화해한다. 그에 따라 둘의 간격도 좁아졌다. 중립을 상징하는 사이드는 초점에서 빗나갔다(out focus). 다섯 번째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보라. 둘 사이는 멀다. 싸운 직후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언제나 가운데서 둘을 중재한다.
가장 맘에 드는 숏. 카메라는 위베르에게 집중하고 있다. 나머지 둘은 초점에서 빗나갔다. 이는 위베르의 심정을 대변한다. 위베르는 전경에게 권총을 들이댄 빈츠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빈츠는 뒤에서 자랑한다. 전경에게 권총을 들이대니까 전경이 졸았다고. 위베르가 그 말에 호응할 리가 없다. 때문에 카메라는 위베르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빈츠와 사이드는 배제했다. 이렇게 장면 하나로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초첨에 빗나간 빈츠는 계속 떠든다.
마지막 장면. 경찰(오른쪽)이 오발로 빈츠를 죽였다. 위베르는 저 다음에 경찰에게 총을 겨누고 서로 대치한다. 사이드는 어디에 있는가? 경찰차 너머에 있다. 경찰차가 경계가 되어 사이드를 경계 밖으로 밀어냈다. 경계 안에서는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 너머에 있는 사이드는 피해를 보지 않을 것 같다. 경찰과 위베르는 서로 총을 겨누고 카메라는 구경하는 사이드의 얼굴을 잡는다. 방아쇠 소리가 난다. 누가 죽었는지 모른다. 관객은 유추할 뿐이다. 단서는 충분하다. 스누피 집에서 러시안 룰렛 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누피는 속임수를 써서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마구 당긴다. 세 친구가 차를 도난할 때 빈츠가 권총에서 총알 하나를 빼 준다. 이 둘을 종합하면 누가 죽었는지 짐작된다. 죽은 사람은 위베르다. 위베르가 든 총은 빈츠의 것이었다. 스누피는 러시안 룰렛으로 총알이 나가지 않는 묘기를 보였고, 빈츠는 차를 도난할 때 총알 하나를 빼었다. 위베르가 방아쇠를 당겼을 때 헛발이 나갔을지로 모른다.

3. 렌즈와 카메라 이동
광각렌즈가 쓰였다. 거의 모든 장면을 광각으로 찍은 듯하다. 왜 광각일까? 만약 의도였다면 '왜곡' 때문일 것이다. 광각은 표준보다 현상을 왜곡한다. 광각이 심해지면 어안魚眼이 된다. 광각은 원근감을 왜곡한다. 가까운 것은 더 가깝게 하고, 먼 것은 더 멀게 한다. 때문에 광각으로 얼굴을 찍으면 안 된다. 렌즈에 근접한 코와 입이 과장된다.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변한다. 이 영화는 얼굴도 광각으로 찍었다.
이는 의도했다는 것이다. 광각을 쓴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뭘까? 감독은 왜곡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표준 렌즈를 쓰면 현상이 왜곡되지 않으니까 광각을 쓴 것이다. 그렇다고 망원을 쓸 수는 없었을 테니. 감독이 보는 세계, 경찰과 양아치가 대치하는 세상이 왜곡된 것처럼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감독은 이를 영상으로 표현하려고 광각을 썼다. 렌즈는 세상을 보는 창이 아닌가. 렌즈 종류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 보는 세상이 달라진다. 감독은 광각렌즈로 왜곡된 세상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의 심도는 얕다. 이상하다. 단렌즈는 보통 심도가 깊다. 딥포커스의 대명사가 단렌즈 아닌가. F스톱의 수치가 같다면 렌즈 초점거리가 짧아질수록 조리개 구경이 넓어지므로 단렌즈는 심도가 깊어야 한다. 영화는 단렌즈를 썼는데도 심도가 얕다. 이것 역시 감독이 의도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영화 분위기 때문이다. 광각으로 왜곡된 현상을 더 꾸미기 위해서. 심도가 얕은 화면은 꿈과 같은 배경을 연출한다. 더군다나 영화는 흑백이지 않은가. 내용은 사실적이면서 형식은 몽환적이다. 다른 이유는 조명 때문이다. 이동숏이 많으므로 조명 설치에 어려움을 느꼈을 테다. 배우와 카메라는 이동해도 조명은 이동할 수 없지 않은가. 감독은 조리개를 열어(심도가 얕아진다) 빛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DJ가 음악을 틀 때 카메라는 조감(bird eyes view)으로 현상을 포착한다. 카메라는 새처럼 건물을 비집고 하늘을 난다. 크레인을 사용한 것 같다. 어쩌면 헬기일지도.
특기할 만한 카메라 무빙은 이것이다.
가장 어렵다는, 달리(dolly)하면서 줌(zoom)하기. 줌과 달리가 합치면 독특한 효과가 발생한다. 인물은 고정되어 있는데 배경이 변한다. 초점은 불변하지만 주변이 변하면서 카메라 무빙이 야릇해진다. 말로 설명해서 뭐하나. 유투브에서 찾아보시기를. 흔히 졸리(zoom + dolly)라고 하는데, 카메라의 두 기능을 합한 것이라서 우리 눈은 이를 경험하기 힘들다. 대표적인 예는 스코시즈의 <Goodfellas>다. 거기서 드니로와 리오타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스코시즈는 그것을 달리줌으로 찍었다. 보면 알겠지만, 앉은 두 사람은 불변하는데 창밖의 배경은 카메라 쪽으로 다가온다. 아마 달리 인(dolly-in)하면서 줌 아웃(zoom-out)한 듯하다. 여기서는 처음 화면이 뒤로 빠질 때 배경에 초점이 맞춰진 것으로 보아 달리 아웃(dolly-out)에 줌 인(zoom-in)한 듯하다.
슬로 모션(slow motion)이 크게 두 번 사용된다. 위베르가 복싱 연습할 때와 비보이가 춤출 때. 슬로 모션은 동작을 우아하게 만든다. 슬로 모션으로 찍은 영상치고 안 멋있는 것 없다. 반면 패스트 모션(fast motion)은 다르다. 패스트 모션은 동작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무성 코미디에서 배우의 움직임이 빠른 이유가 그러하다. 원빈과 김태희라 할지라도 패스트 모션 앞에서는 이미지 구길 수밖에 없다. 슬로 모션이 긍정을, 패스트 모션이 부정을 뜻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장면을 빠르고 경박하게 보여줄 리 없지 않은가. 이 장면은 왜 슬로 모션인가? 이들은 영화에서 특별한 경우다. 다른 애들은 싸우거나 욕할 줄밖에 모른다. 마약 빨면서 말썽 부리는 편보다 운동과 문화에 심취하는 편이 낫다. 영화는 슬로 모션으로 이들을 멋지게 표현했다.

ps. 감독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삼류는 테크닉에 치중한다.
ps. 렌즈는 표준이 제일이다.
ps. 사이드와 위베르가 경찰에 잡히고 빈츠 혼자 돌아다닌다. 그 시퀀스는 폭력으로 점철돼 있다. 빈츠는 처음에 극장에 간다. 극장에서 폭력적인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다음에 간 곳은 복싱 경기장. 빈츠는 싸우는 선수를 지켜본다(카메라는 빈츠를 클로즈업한다). 마지막은 술집인데,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인다. 동행 중 한 흑인이 화나서 술집 문지기를 총으로 쏴 죽인다.
ps. 필립 나혼이 카메오로 등장한다(경찰 역).

특근(After Hours)

이 영화가 그 영화였구나. 일전에 지인한테 들었다. 엄청 재밌는 영화가 있다고. 한 남자가 퇴근 후 밤에 노는데 일이 꼬여서 생고생 한다고. 집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마지막 장면이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이와 비슷한 프랑스 영화를 봤기에 그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지인은 아니라고 했다. 제목이 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감독이 누구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지인은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 영화가 재밌다는 것뿐. 언젠가 볼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어제가 그날이었다. 평범한 봉급생활자 폴. 그가 머피의 법칙에 휘말릴 때 나는 알아차렸다. '아! 걔가 말한 영화가 이거구나.' 지인 말대로 이 영화는 재밌다. 그가 알았던 것, 영화가 재밌다는 사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제목은 After Hours, 우리말로 특근이고, 감독은 마틴 스콜세지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평범한 샐러리맨이 있다. 그의 이름은 폴이다. 폴은 퇴근 후 집에 있다가 심심해서 카페에 간다. 책을 읽는데 한 여자가 말을 건다. 그녀는 마시. 마시는 친구가 베이글 모양의 문진을 파는데 살 생각 있으면 전화하라고 번호를 알려준다. 폴은 집에 와서 그 번호로 전화한다. 마시와 연락이 닿고 마시는 이리로 오라고 폴을 유혹한다. 폴은 마시의 집에 찾아간다. 이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다. 나중에 폴은 죽을 위기에 내몰린다. 집에 가서 다음 날 출근을 준비해야 하는 폴. 병신같이 일이 꼬이는 바람에 밤을 헤맨다. 이 영화는 머피의 법칙이 관건이다. 숙명 앞에 개인이 무력하듯이, 폴은 꼬이는 사태를 바로잡지 못한다. 그는 닭장에 갇힌 닭이고, 새장에 갇힌 새다. 불합리와 부조리는 그의 몸부림을 무력화한다. 그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쓸려가는 것이다. 영화는 그런 관점을 유지한다. 그것이 영화의 주제다. 숏 구성 또한 그것을 따른다. 스콜세지가 대충 만드는 감독인가? 아니다. 그가 주제를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살펴보자. 숏 구성과 각종 디테일을 분석하면 영화가 더 재밌어진다.

1. 닫힌 형식(감옥 프레임)
영화에서 무의미한 숏은 없다. 감독은 숏을 구상할 때 생각을 거듭한다. 숏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숏은 영화의 기본 단위이며 기초 도구다. 이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영화의 질이 달라진다. 감독의 역량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숏으로 시작해서 숏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숏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어떤 숏은 주제를 담고 있고, 어떤 숏은 복선을 암시하며, 어떤 숏은 행동에 집중한다. 개중 눈여겨봐야 할 숏은 첫 번째, 주제를 담고 있는 숏이다. 이 영화에도 주제를 환기하는 숏이 많다. 여기서 주제는 무엇인가? 무력한 개인이다. 부조리에 쩔쩔매는 개인, 머피의 법칙에 갇힌 개인. 영화는 프레임을 사용해 이를 표현했다. 프레임은 인물을 가두고 답답함을 연출한다. 프레임에 갇힌 배우는 죄수를 연상시킨다. 군말 필요 없다. 장면을 보며 생각해보자.
폴은 마시에게 초대받고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여기는 공동주택 계단이다. 폴이 계단을 오르고 있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광각렌즈를 쓴 듯한데, 원근감이 왜곡되었다. 광각은 멀리 있는 것은 멀리, 가까이 있는 것은 가까이 보이게 만든다. 멀리 있는 폴은 계단을 올라도 오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겨워 보인다. 오버랩 효과가 사용됨으로써 시간의 경과 또한 길게 느껴진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폴의 여정이 험난할 것을 뜻한다. 폴이 겪을 오늘 밤이 길고 고되다는 뜻이다. 중첩된 직사각형 프레임 또한 그를 가두고 있다.
거울이 자주 등장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거울이 있다. 그는 거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관객은 안다. 그가 갇혀 있다는 사실을. 두 번째 장면에 보이는 낙서가 흥미롭다. 좆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좆 된다는 뜻이다. 그는 저 낙서를 보고 줄리(술집 알바녀)를 멀리한다. 내 생각에 그가 머피의 법칙을 멈추고 싶었다면 줄리를 받아들였어야 했다. 줄리 집에서 하룻밤 잤다면 아무 일 없었을 테다. 열쇠도 자기한테 있으니 다음 날 집에 갔을 테고. 그러고 보면 낙서는 속임수다. 화근이다. 저 낙서 때문에 줄리를 멀리하고 다른 일에 휘말리지 않는가. 낙서 하나 그를 돕지 않는다. 뭐든 안 되는 날이다.
아까가 거울이었다면 이번에는 철조망이다. 철조망은 전형적으로 감옥을 상징한다. 이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다. 위 장면들을 보라. 그는 오늘 밤 감옥에 갇혔다. 죄수 신세나 다름없다. 첫 번째는 지하철역이다. 요금 인상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무임승차하려다 경찰에 걸렸다. 영화는 철조망을 전경에 세워 그의 처지와 상황을 암시한다. 두 번째는 클럽이다. 모히칸에게 둘러싸여 머리 깎이고 있다. 그는 오늘 밤 포위되었다. 벗어날 수 없다. 세 번째는 자경단을 피해 숨은 곳이다. 재수 없게도 근처에서 살인이 벌어진다. 심도가 얕아서 눈에 띄지 않지만 전경에 철조망이 있고 측면과 후면, 심지어 얼굴까지 철조망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마지막은 카페. 오해를 풀어줄 만한 사람을 만나 숨을 돌리고 있다. 방심은 금물. 창을 보라. 차광막이 철조망 같다. 실제로 저 남자(술집 사장)는 도와준다고 하면서 자경단 말에 넘어가 그를 잡으려고 한다.
택시를 잡는 와중에 게일(여자)을 만난다. 게일은 그를 집으로 들인다. 전화까지 친절하게 허락한다. 이제 고난은 끝인가? 우리는 이 숏을 통해 고난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는 또 프레임에 갇혔다. 이번에는 거울도 아니고 철조망도 아니다. 집 구조 자체가 프레임이다. 직사각형 틀이 보이는가? 그는 틀 안에 갇혀 있고 게일은 밖에서 지켜보고 있다. 이 숏은 잠깐이 아니다. 상황이나 행동은 변하지만 틀은 유지된다. 카메라는 틀 안에 인물을 가두고 계속 비춘다.

2. 사물을 이용한 심리 연출
미장센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에만 치중하지 않는다. 화면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미장센의 요소가 된다. 때문에 감독은 소품을 중시한다. 미술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소품의 모양도 중요하지만 위치도 중요하다. 카메라가 그것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대개 중요한 사물은 중앙에 놓인다. 측면-후방에 놓이는 사물은 비중이 떨어진다. 만약 전경에 놓인다면? 카메라가 사물을 걸치고 인물을 잡는다면? 이러면 곤란해진다. 앞에 놓인 사물이 인물을 가리기 때문이다. 장애물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전경에 사물이 놓이면 관객이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을 걸치고 상황을 찍는 것은 실수로 오인될 수도 있다. 장르 영화는 이를 적극 사용한다. 어떤 영화는 시종일관 전경에 사물을 위치시켜 관객의 심리를 압박한다. <에이리언>이 그렇다. 히치콕의 영화에도 종종 나온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전경을 가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뭔가 막혀 있는 느낌. 답답함. 장애물 같은 소품이 주인공 심리를 대변한다. 이는 주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장면을 보면서 살펴보자.
기본적인 미디엄-투숏인데 구도가 복잡하다. 화면에 놓인 사물들을 보라. 앞에는 조각상(편의상 그렇게 부르자)과 도구가 있고, 뒤에는 기둥과 사다리가 있다. 비례가 맞는 것이 없다. 특히 기둥과 사다리는 불안정한 느낌을 배가한다. 사다리가 기둥처럼 올바로 서 있었다면 조금은 안정적이었을 테다.
원숏도 그냥 보여주는 법이 없다. 꼭 뭔가 걸쳐 있다. 저것은 조각상의 팔인데, 이를 관객에게 각인시켜서 결말과 연관되게 한다. 결말은? 폴은 저 조각상처럼 된다. 폴이 조각상이 된다(무슨 말이냐고? 영화를 보라). 전경에 배치된 팔이 답답함을 준다. 다른 장면도 살펴보자. 모두 전경에 무엇이 놓여 있다.
이는 주제와도, 내용과도, 상황과도, 심리와도 일치한다. 답답함은 영화를 통괄하는 분위기다. 껄끄러움.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은 느낌. 인물 관계도 사물을 통해 표현된다.
폴과 마시가 카페에서 대화하고 있다. 폴은 마시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여기서 마음이 변한다. 마시가 유부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자 관계도 복잡한 듯하다. 폴은 그녀의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접는다. 둘은 이어지지 않는다. 이 숏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두 사람의 괴리감을 상징하는 소품이 존재한다. 차광막? 아니다. 어깨가 드러난 마시의 옷? 아니다. 두 사람을 가르는 검은 막대기. 보이는가? 메뉴판이다. 세워진 메뉴판을 측면에서 찍었기에 막대기처럼 보였다. 기본적인 미디엄-투숏인데 메뉴판이 중간에서 둘을 분할하고 있다. 해석이 억지스럽다고? 나도 처음에는 과장이라고 생각했다. 메뉴판이 중간에 놓였다고 괴리감을 상징할 리가 없지 않은가.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리고 이 해석을 확신했다. <택시 드라이버>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그때도 카페인데, 앉아 있는 두 사람을 저런 소품이 가로막아 분할한다. 실제로 그 영화에서 남녀는 잘되지 않는다. 로버트 드니로는 여자를 포르노 극장에 데려가고 퇴짜 맞는다. 그래도 못 믿겠다고?
반박의 여지가 없다. 손은 잡았지만 막대기가 둘을 분할하고 있다. 이 숏은 말한다. "너희 둘은 절대 이어질 수 없어. 안 어울려!"
하나 더 살펴보자. 술집 사장이 돌아오고 폴은 열쇠를 주고받으려고 줄리 집에서 뛰쳐나온다. 이제 열쇠만 교환하면 된다. 폴은 집에 갈 수 있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이 숏을 보라. 뭔가 일이 꼬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두 사람을 분할하는 메뉴판도 막대기도 없는데 뭐가? 키스하는 두 게이. 우연하게도 술집 사장(왼쪽)은 마시의 애인이고, 폴은 마시와 잘 뻔했다. 한 여자를 공유한 두 남자. 그 사이에 게이라니. 만약 폴과 술집 사장이 게이였다면 이 숏은 긍정적인 의미가 된다. 저 키스하는 게이가 복선 역할을 할 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게이가 아니다. 열쇠를 교환할 수 있을까? 어림없다. 게이들이 두 사람을 분할하고 있다. 폴과 술집 사장은 게이처럼 키스할 수 없다. 역시 열쇠도 교환할 수 없다.
인물 관계 얘기가 나와서 숏 하나 추가. 키키의 남자 친구인 홀스트가 폴에게 뭐라고 한다. 왜 마시에게 짜증을 냈느냐고. 위압적인 홀스트의 모습. 폴은 무서워서 깨갱한다. 굳이 폴의 얼굴을 볼 필요가 있나? 이 장면 하나로 폴의 심리가 밝혀졌는데. 왼쪽 아래에 놓인 조각상을 보자. 아까도 말했듯이 조각상은 폴을 상징한다. 조각상의 자세가 어떠한가? 센스 넘치는 투숏이다.

3. 대사와 주제와 내용의 연관성
지겨워도 조금만 참자. 스콜세지의 연출 기법을 파헤칠 작정이니까. 영화에는 장면 못지않게 대사도 중요하다. 대사만 잘 들어도 구조와 주제가 파악되는 경우가 있다. 거장은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다. 대사 하나도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모든 대사는 주제와 연관되어 수렴한다. 그러니 귀를 세우고 말을 경청하자.
폴이 마시의 집에 도착했을 때 마시는 없다. 마시의 친구, 조각가인 키키가 혼자 작업을 하고 있다. 키키는 어깨가 아프다고 말한다. 폴은 키키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과거 얘기를 꺼낸다. "난 어렸을 때 편도선 수술을 했어요. 수술 후 소아과 병실이 만원이어서 화상 환자 병실에 있었죠. 헌데 담당 간호사가 안대를 주는 거예요. 그걸 끼고 있으라면서요. 그리고 절대 풀지 말랬죠. 안대를 풀면 수술을 다시 해야 한다고요. 편도선과 눈이 뭔 상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날 밤… 밤이었을 거예요. 난 결국 안대를 풀고 말았죠. 그랬더니…." 이 얘기는 영화 줄거리와 비슷하다. 안대를 푼 어린 폴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을 테다. 언제? 밤에. 폴은 '밤'이라는 말을 강조한다. 두 번이나 말한다. 왜? 영화의 배경 시간도 밤이기 때문이다. 폴이 영화에서 고생하는 시간은 밤이다. 출근하는 아침도 아니고, 근무하는 낮도 아니고, 퇴근하는 저녁도 아니다. 어린 시절 그때 밤이 끔찍했듯이 오늘 밤도 끔찍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화상에 대한 두려움도 반복된다. 화상은 폴의 트라우마다. 폴이 마시의 물건을 뒤졌을 때 화상 환자에 관한 책이 발견된다. 폴은 환자 사진에 역겨움을 느끼고 책을 덮는다. 그때 마시가 들어온다.
손에 들린 초를 보라. 크다. 커도 너무 크다. 사진으로 봐서 저 정도지 영화로 보면 더 크다. 촛불은 폴을 태워버릴 것 같다. 화상 입힐 것 같다. 스콜세지는 저 초를 따로 준비했을 것이다. 미술팀한테 부탁해서 최대한 활활 타오르는 초를 가져오라고 했을 테다.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폴이 게일을 만났을 때, 게일은 폴의 몸에 붙은 신문 조각을 읽는다. 신문에 무슨 기사가 났는지 들어보자. "어젯밤 맨하탄 소호 부근에서 한 남자가 분노한 무리에게 온몸이 찢겨 사망했다. 찢긴 옷에서는 신원을 파악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피해자의 얼굴은 심하게 손상되어…." 이것 또한 복선이다. 이는 이따 살펴보기로 하자. 게일은 신문 조각을 떼어주려고 한다. 폴은 아프다며 그녀를 말린다. 게일이 말한다. "태워야겠어요." 이 말을 '화상'을 연상시킨다. 게일은 성냥을 빌려 오겠다며 나간다. 마시가 들고 있던 촛불과 게일이 빌려 오겠다던 성냥이 상통한다. 신문 기사는 무슨 뜻인가? 기사에 따르면 남자는 맨하탄 소호에서 죽었다. 소호는 영화의 배경 도시다. 폴이 생고생 하는 곳이다. '분노한 무리'는 누구일까? 바로 자경단이다. 폴은 도둑으로 오해받아 자경단에게 쫓긴다. 찢긴 옷에서 신원을 파악할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왜일까? 폴이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키키의 작업을 도와줄 때 옷이 더러워지는데, 키키는 옷을 빨아줄 테니 갈아입으라고 한다. 폴은 흰 셔츠에서 검은 셔츠로 갈아입는다. 검은 셔츠는 키키의 것이므로 신원을 파악할 단서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얼굴이 심하게 손상된 이유는? 이는 나중에 폴의 말을 통해 드러난다. 폴은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 머문다. 거기서 폴은 자기가 겪은 일을 설명한다. "내가 자신의 애인을 만나러 온 걸 알았다면 내 얼굴을 묵사발로 만들었을 테죠." 폴은 얼굴 때리는 시늉까지 보인다.

4. 조각상
폴은 키키의 조각상을 보고 말한다.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이 떠오른다고. 그는 '절규'를 '절망'(번역상)이라고 잘못 말한다. 키키는 '절망'이 아니라 '절규'라고 말한다. '절망'이든 '절규'든 말은 중요하지 않다. 조각상이 뭉크의 그 작품을 환기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 뭉크의 <절규>일까? 키키의 조각상과 뭉크의 <절규>를 비교해보자.
비슷하다. 확실히 두 작품은 통하는 데가 있다. 스콜세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절규>를 택했을까?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두 작품이 주인공 폴을 대변한다는 것은 눈치챘을 것이다. '너는 오늘 밤 이렇게 절규할 거야.' 이런 뜻 아니겠는가. 문제는 스콜세지가 왜 <절규>를 택했느냐다. 뭉크의 저 작품이 왜 <절규>인가? 사람이 절규하는 표정을 지어서? 그는 왜 절규하는가? 배경에도 보이듯이 세상의 혼돈 때문이다. 붉은 하늘과 검은 강물을 보라. 선이 불안정하다. 절규하는 자의 몸도 그에 따라 출렁인다. 더 무서운 것은 뒤에 보이는 사람이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걷고 있다. 절규하는 자는 무서워하는데 그들은 태연해 보인다. 세상의 혼돈은 절규하는 자 혼자 감당할 몫이다. 영화 줄거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림 속 세상은 영화 속 세상과 일치한다. 둘 다 혼돈이다. 부조리하다. 불합리하다. 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림 속 절규하는 자는 혼자다. 혼자 절규하고 있다. 영화에서도 폴은 혼자 미친다. 이상한 일을 혼자 겪는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은데(특이하기는 해도) 자기만 도둑으로 오해받고 죽을 위기에 몰린다. 스콜세지는 뭉크의 <절규>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절규>가 고정된 이미지라면 <특근>은 움직이는 이미지다.

5. 앵글
위는 앙각이고 아래는 부감이다. 대비되는 앵글이 인물의 위치와 권력을 나타낸다. 폴은 키키와 홀스트를 만나러 클럽에 들어가야 한다. 문제가 생겼다. 건장한 사내가 문을 지키고 있다. 카메라는 계속 이런 식으로 둘을 잡는다. 문지기는 앙각으로, 폴은 부감으로. 앙각으로 올려다본 문지기는 권위적이다. 강해 보인다. 앙각은 인물에 힘과 권력을 부여한다. 관객은 올려다보는 입장이 되므로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낀다. 부감으로 내려다본 폴은 약소적이다. 한없이 작아 보인다. 부감은 인물을 나약하게 만든다. 관객은 내려다보는 입장이 되므로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이 앵글들은 상황과도 일치한다. 폴은 문지기에게 겁을 먹고 못 들어가고 있다. 뻔한 앵글이지만 무의식적 효과는 크다.

6. 노란색
색도 연출 기법의 하나다. 여기서는 노란색에 주목해야 한다. 노락색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러 뜻이 있겠지만 옐로우카드에서 나타나듯이 그것은 경고를 의미한다. 조심하라는 뜻이다. 영화에서 노란색이 어떻게 쓰였는지 보자.
폴은 세 여자를 만난다. 세 여자를 만나 생고생 한다. 세 여자는 누구인가? 첫 번째 마시, 두 번째 줄리, 세 번째 게일이다. 셋 모두 폴을 좋아하지만 그를 배신한다. 마시는 자살해서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줄리는 그의 얼굴을 그려 수배지를 만들고, 게일은 자경단 두목이 되어 그를 잡으러 다닌다. 세 여자 모두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영화는 노란색을 통해 그것을 알린다. 이 여자를 조심하라고. 둔한 폴이 그것을 알았을 리 없다. 우선 줄리(첫 번째 장면). 그녀의 옷 색깔을 보라. 노란색이다. 뒤에 커튼도 노란색이다. 다음 게일(두 번째 장면). 그녀의 옷도 노란색이다. 스콜세지는 두 여자에게 노란색 옷을 입혀 경고의 뜻을 나타냈다. 나머지 한 명, 마시는? 이대로라면 마시도 노란색 옷을 입었어야 한다. 이상하게도 마시만 노란색 옷을 안 입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노란색 옷은커녕 노란색 소품조차 보이지 않는다. 마시가 나오는 시퀀스에서, 그녀는 흰색 옷만 입고 빨간색 립스틱만 바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연출에 통일성이 없다. 나는 스콜세지가 고도의 수법을 썼다고 생각했다. 노란색을 상징하는 디테일이 어디에 숨어 있을 것이 확실했다. 고심 끝에 한 장면이 걸려들었다.
폴이 마시의 물건을 뒤질 때 발견한 연고약이다. 해석하면, 2도 화상에 바르는 약이다. 이게 노란색이랑 무슨 상관인가? 연고약이 노란색인가? 아니다. 영어를 들여다보자. 'picrate'라는 단어가 보이는가? 피크레이트. 생소한 단어다. 피크레이트는 피크르산이 만드는 분자화합물이다. 피크르산은 무엇인가? 전문 설명에 따르면 이렇다. '페놀에 황산을 작용시켜 다시 진한 질산으로 나이트로화하여 만드는 노란색 결정이며 폭약으로 쓰인다.' 확대해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스콜세지가 노린 것이 분명하다. 만약 세 여자에게 노란색 옷을 입혔다면 연출 의도가 눈에 띄었을 테다. 눈에 띄면 촌스러워지기 마련이다. 스콜세지는 마시에게만 일부러 노란색 옷을 안 입히고 피크레이트라는 화학물을 통해 노란색을 환기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이 숏이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이다. 클로즈업은 해석 가능성을 축소한다. 감독의 의도는 클로즈업을 통해 드러난다. 카메라가 접근했다는 것은 주의를 요망한다는 뜻이다. picrate라는 단어에만 괄호가 쳐져 있는 점도 흥미롭다. 다른 하나는 마시의 대사다. 그녀는 말한다. "오늘 밤은 왠지 폭발할 것 같아요.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이는 폭약으로 쓰이는 피크레이트를 환기한다. 또한 마시의 성격과도 상통한다. 마시는 조울증이다. 기분이 수시로 변한다. 연고약은 노란색 - 화상 - 마시의 성격을 암시하는 소품이다.

7. 주제
구사일생으로 폴은 직장으로 돌아간다. 이 웃지 못할 하룻밤 해프닝을 통해 영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미 보았듯이 세상(밤에 겪은 세상)은 혼돈이다. 부조리하다. 직사각형 프레임처럼 감옥이다. 낮은 어떠한가? 폴이 직장에서 일하는 때인 낮은 어떠한가? 아래 장면을 보자.
폴이 출근하는 장면(아래)과 퇴근하는 장면(위)이다. 둘 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다. 어마어마한 철문은 감옥을 환기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것은 보통 문이 아니다. 문을 여닫는 직원 옷차림을 보라. 마치 교도관 같다. 직장도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첫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폴이 신입사원에게 일을 가르쳐주는데 신입은 말한다. 이런 일만 계속하기 싫다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그때 폴은 딴 데를 쳐다본다. 똑같은 모양을 한 서류, 기계처럼 타이핑 치는 직원, 책상 한쪽에 있는 애완견과 아이들 사진. 폴은 지루함과 고독감을 느낀다. 직장도 감옥이라면 집은 어떠한가? 폴은 혼자 산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지만 외로움을 못 참고 카페에 간다. 거기서 마시를 만난다. 종합하면 집, 직장, 사회(밤)가 모두 감옥이다. 현대인은 감옥이라는 세상에 살고 있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죽음을 불러올 뿐이다(폴이 자경단에게 쫓겨 맞아죽을 뻔하지 않은가).

8. 감독 겸 카메오
히치콕 영화의 묘미는 무엇인가. 히치콕 찾기다. 히치콕은 자기 영화에 카메오로 즐겨 출연했다. 스콜세지도 마찬가지다. <택시 드라이버>에 그가 나온다. 잠깐.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알 테다. 이 영화에도 스콜세지가 나온다. 찾기 쉬우니까 밝혀 둔다.
장난꾸러기 스콜세지는 관객이 알아차릴까봐 카메라에 전등을 비춘다. 그는 도망치는 폴에게 전등을 비추는데 그 모습은 인간을 조종하는 신神 같다. 감독은 곧 영화의 신이다. 때문에 그가 위에서 전등을 비추고 있다.

ps. 겉은 코미디, 속은 공포.
ps. 줄리 집에서 쥐가 덫에 걸린다. 쥐는 폴을 상징한다. 줄리가 베이글빵 문진을 보여주자마자 쥐가 잡히기 때문이다. 베이글빵 문진은 키키가 만든 것이다. 폴은 줄리의 집에 머물며 전에 일어난 일(마시의 자살)을 잊고 싶었는데 줄리는 키키가 만든 문진을 보여줘 상황을 연결한다. 이는 폴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했다는 뜻이다. 쥐가 덫에 걸린 이유도 그러하다.
ps. 폴과 마시가 카페에서 대화할 때 마시는 남편의 습관을 얘기한다. 남편은 오르가슴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항복하라, 도로시." 이것도 그냥 넣은 대사는 아닌 듯한데 정확한 뜻은 모르겠다. 내 생각에 도로시는 폴을 뜻하고 항복하라는 말은 꼬이는 운명에 저항하지 말라는 뜻 같다.
ps. 블루스 추는 행위가 반복된다. 설명보다 장면이 낫겠다.
ps. 여배우의 발견. 로잔나 아퀘트(마시). 그녀는 예쁘고 야하고 발랄하다. 잊을지 모르니까 그녀의 얼굴을 올려 두겠다.

간장 선생(Dr. Akagi)

이 영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우나기>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을 봤다면 이해가 쉬웠을 테다. 주제의식은 세 작품이 동일하니까. 간염을 통해 군국주의를 비판한 점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이 영화의 핵심은 반전이 아니라 성욕이다. 나쁜 뜻으로 쓰이는 성욕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쓰이는 성욕. 인간의 원초적 힘. 약동하는 에너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간장 선생>은 회춘 영화다. 성욕을 긍정함으로써 인생도 긍정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본래 그런 감독이다. 그의 주제의식은 엘랑비탈이다. 에너지를 긍정함으로써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준다. 초점은 국가가 아닌 개인에 맞춰지고, 개인은 억압에서 벗어나 성욕을 긍정해 해방을 맞이한다. 이것이 쇼헤이의 작품 세계다. 그는 개인의 해방과 성욕의 긍정을 통해 희망을 제시한다. 때문에 성性적 코드를 외면하면 안 된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간염'에만 몰두하면 낭패다. 간염은 전쟁과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설정에 지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소노코다. 아카기를 따라다니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그녀. 원초적 힘과 근원적 비약을 상징하는 인물. 마지막에 아카기는 소노코를 안고 웃음 짓지 않는가. 덩달아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도 끝난다. 간염은 사라졌고(간염은 전쟁이 일으킨 것이므로) 아카기는 에너지를 되찾았다. 이는 해피엔딩이 분명하다. 전쟁이 종식되어 국가 개념도 끝났고, 개인이 된 아카기는 소노코를 통해 생명의 힘을 얻었으니까. 어떻게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살펴보자. 이야기는 복잡하지만 '성욕' '생명' 개념에 입각하면 풀이된다.
크레딧과 함께 아카기가 달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왕진을 위해 달리고 달린다. 여기서는 힘들었는지 잠깐 쉬었다 간다. 그는 무를 먹고 다시 달린다. 왜 무일까? 그냥? 촬영장 근처에 무밭이 있어서? 이 초반 장면에 주제가 다 드러났다. 꼼꼼한 관객이라면 눈치 챘을 테다. 무는 남근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고추. 나쁜 뜻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쓰이는 '힘'이다. 아카기가 무를 먹고 다시 달린 이유도 그렇다. 무(남근)를 통해 힘을 얻은 것이다. 감독의 의도가 짐작되는가? 억지스럽다고? 계속 살펴보자.
아카기는 달리면서 편액에 쓰인 글을 읊조린다. 개업의開業醫 정신 같은데 설명하면 이렇다. '개업의는 발이 생명이다. 한 다리가 부러지면 다른 다리로 달리고, 두 다리가 부러지면 손으로 달리고, 죽기 살기로 달리고 또 달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한다.' 뭔가 느껴지지 않는가? 의사로서 지켜야 할 신조 말고. 히포크라테스 선서 말고. 여기서 핵심은 '죽을 때까지 달려야 한다.'라는 말이다. 이는 죽을 때까지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남자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긍정해야 한다는 거다. 달린다는 것은 성욕(에너지)과 상통한다. 실제 아카기는 간염을 연구하는 동시에 소노코를 거부하고, 감연 연구 때문에 왕진을 게을리한다. 간염 연구가 달리기를 중단한 것이다. 결국 아카기는 간염 연구에 실패하고 실의에 빠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간염 연구가 아니었다. 간염을 연구해서 국익을 도모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달리기다. 왕진이다. 이는 에너지를 긍정하는 것이고 소노코를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된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 개념을 파악해야 한다. 첫째, 간염. 둘째, 왕진. 간염 연구는 국가와 관련한 일이다. 아카기는 간염의 정체를 파악해 국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이는 토모루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토모루는 말한다. "간염은 전쟁시에 유행한다는데." 아카기가 말한다. "자네도 조국을 위해서 간염 박멸에 함께 힘쓰자구." 종합해보자. 간염 연구는 국가 이득으로 이어지고 이는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된다. 간염 연구는 곧 전쟁 옹호다. 여기에 '개인'은 없다. 오로지 국가에 종속되어 명령에 움직이는 조직과 단체만 있다. 간염 연구는 또 에너지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아카기가 간염을 연구할 때는 혼자다.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혼자 연구한다. 그때 소노코는 없다. 왕진할 때는 소노코가 따라다니지만 간염을 연구할 때는 아카기 혼자다.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감독은 다음과 같은 대사를 넣었다. 아카기가 밥도 안 먹고 현미경만 들여다보자 소노코가 말한다. 선생님은 참 별난 분이라고. 밥도 안 먹고 박테리아만 보고 있다고. 이는 소노코의 불평이자 왜 자기를 거부하느냐는 말이다. 소노코가 아카기와 함께할 때는 식사와 왕진이다. 아카기는 간염에 정신이 팔려 식사와 왕진을 미룬다. 자연히 소노코와 멀어지고 성욕(에너지)과도 괴리된다. 영화에서 간염 연구는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반대로 왕진은 긍정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왕진할 때는 소노코가 따라다닌다. 에너지가 곁에 있는 것이다. 또한 간염을 연구할 때와 다르게 뛰어다닌다. 편액에 쓰인 글처럼 달리는 것이다. 에너지를 상징하는 소노코, 역시 에너지를 상징하는 달리기. 왕진은 이 둘을 가능하게 한다. 긍정적인 뜻일 수밖에 없다. 왕진은 간염 연구와 다르게 개인적인 일이고 반전反戰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카기는 간염 연구와 왕진 중 갈등하는데 왕진을 택함으로써 간염 연구를 포기하기 때문이다. 연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국익보다 개인의 철학(개업의 정신)을 중시한다는 뜻이다. 연구 포기는 곧 군국주의 반대, 즉 반전으로 이어진다. 정리하면 이렇다. 간염 - 국익 - 군국주의 - 전쟁 옹호. 왕진 - 소노코(에너지) - 개인 - 반전.
줄거리를 살펴보자. 아카기가 간염 연구를 시작한다(왕진에 소홀). 포로를 은닉한 사실이 적발돼 군인에게 잡힌다. 연구를 재개하지만 다카하시 할멈이 죽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 아버지를 살리려고 바다 건너온 딸을 보고 개업의 정신을 되새긴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서 소노코를 받아들인다. 원자폭탄 투하로 전쟁은 끝난다. 요약하면, 간염 연구를 포기하고 왕진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전쟁을 비판하고 성욕(에너지)을 긍정했다는 뜻이다. 처음에 아카기가 무를 먹고 힘을 얻었듯이 마지막에도 소노코를 끌어안고 회춘한다. 간염은 무엇인가? 그것은 전쟁에 대한 조롱이다. 포로 피터가 맞을 때 한 말을 생각해보라. "이놈은 머리까지 간염에 걸렸어." '이놈'은 일본을 뜻한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군대. 머리까지 간염에 걸렸다는 말은 일본이 미쳤다는 뜻이다. 간염이 병으로서 병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정신병이라는 것이다. 아카기는 왜 간염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럴 수밖에. 간염의 원인은 전쟁이다. 전쟁이 간염을 일으켰다. 타모루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간염이 전쟁시에 유행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아카기 개인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간염이 사라지려면 그 원인인 전쟁이 끝나야 한다. 마지막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빨간 부분이 간이다. 원자폭탄 투하로 불길이 솟았다. 피터의 말처럼 머리 부분도 빨갛다. 머리까지, 뇌까지 간염에 걸린 것이다. 결국 인간의 광기가 전쟁을 일으켰고 전쟁이 간염을 퍼뜨렸고 무고한 백성이 죽었다는 뜻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간염을 통해 전쟁을 비판한 것이다. 아카기가 유곽 마담과 대화하는 장면도 살펴보자. 아카기가 술 마시며 말한다. "군인들은 이렇게 좋은 술을 먹나?" 마담이 말한다. "대 일본제국 군인들인걸요." 아카기가 말한다. "민간인은 끼니도 못 때우는 판에." 전쟁에 대한 비판은 또 있다. 꿈 장면인데, 아카기는 꿈에서 아들을 만난다. 아들은 외국인 포로의 몸에 생체실험을 한다. 아카기는 그만두라고 말한다. 이는 일본 군대의 잔혹성을 비판한 것이다. 죽은 사람의 간을 꺼낸(물론 허락 받았지만) 자신을 비판한 것이기도 하다. 꿈은 무의식을 반영하지 않는가.
소노코를 살펴보자. 그녀는 창녀다. 영화에서 '창녀'는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어부의 딸이다. 어부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다. 바다는 생명의 기원이다. 생명체는 바다에서 탄생하지 않았는가. 쇼헤이 영화에는 바다가 많이 나온다. 바다는 힘, 생명, 근원, 모성 따위를 상징한다. 근본적으로 남성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회귀해야 할 곳이기도 하고. 소노코는 늘 바다와 함께한다. 바다에서 농어 잡는 장면도 나오고, 바다에서 수영하는 장면도 나오고, 바다에서 고래 사냥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녀는 힘과 생명을 상징하는 존재다. 간염이 부정적 뜻인 반면에 그녀는 긍정적 뜻이다. 그녀는 초반에 등장한 무와 일맥상통한다. 아카기에게 생명을 선사하는 대상이다. 우메모토 스님은 상담하러 온 산키치에게 불상을 보여주며 말한다. "해변에 떠내려온 관음상이야. 소노코라 생각하고 절해." 이는 소노코가 신 같은 존재라는 뜻이다. 해변에서 떠내려왔다는 것은 바다를 건너왔다는 뜻이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이고 인간의 이상향이다. 여러모로 판단건대, 소노코는 바다이자 생명이자 구원이자 영화의 주제다.
그런 그녀를 아카기는 거부한다. 소노코가 좋다며 안기지만 그는 그녀를 밀친다. 간염 연구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아카기는 아직 개인보다 국가에 매몰돼 있고 욕망보다 질서를 중시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자.
소노코 "박테리아한테도 암수가 있어요?"
아카기 "암수 구분은 없지만 자손번식 행위는 하지."
소노코 "매춘은 안 해요?"
아카기 "자연계에 그딴 건 없어. 만물은 자유롭게 교미하지. 정조에 신경 쓰는 건 인간뿐이야."
소노코 "인간보다 낫네. 자유롭고."
쇼헤이의 성적 가치관이 드러난다. 그는 성욕을 긍정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도 이와 주제가 같다. 인간에게 성욕은 생명 에너지다. 그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다. 긍정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약동을 느껴야 한다. 삶을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을 기증한 하카마다가 임종 직전에 뭐라고 말하는가. 그는 난데없이 말한다. "바다를 보고 싶구나." 바다는 성욕, 모성, 생명을 뜻한다. 죽기 직전에 희구하는 것이 바다인 것이다. 어쩌면 죽기 싫어서 생명을 뜻하는 바다를 말했을 수도 있다. 해석은 자유. 바다가 구원이자 희망이라는 점은 불변한다.
다카하시 할멈이 죽자 아카기는 망연자실한다. 간염 연구를 중단하고 회의에 빠진다. 어찌할지 몰라 상처喪妻한 곳에 앉아 있는데 누가 찾아온다. 한 소녀다. 그녀는 다른 마을에 산다. 아빠가 아파서 찾아왔다고 한다. 미군 비행기를 피해 바다에 몸을 숨겨 왔다는 말도 덧붙인다. 아카기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된다. 소녀는 묘하게도 소노코를 닮았다. 얼굴이나 옷차림이 비슷하다. 그녀는 소노코처럼 피부가 까맣다. 건강하고 당차다. 아카기는 소녀를 통해 생명을 느끼고 욕망을 긍정한 것이다. 여기서 욕망은 왕진과 상통한다. 아카기는 편액을 다시 걸고 개업의 정신을 되새긴다. 개업의 정신이란 달리는 것이다. 욕망을 긍정하고 생명을 분출하는 것이다. 마지막 고래도 생명을 상징한다. 고래는 모성母性의 바다에서 노니는 남성의 힘이다. 즉, 남근이다. 무와 일치한다(처음에 무, 마지막에 고래). 소노코는 고래를 잡으려고 한다. 고래는 그녀를 심해로 이끌고 그녀는 바지가 벗겨진다.
뒤태를 보라. 얼마나 건강한가. 생명이 느껴진다. 고래를 잡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남근을 상징하는 고래가 여자의 몸을 드러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황하는 아카기. 나라면 벌써 껴안았을 테다.
전쟁은 끝나고 간염은 불길이 되어 사라진다. 아카기는 무엇을 얻었는가? 생명을 얻었다. 그는 소노코를 끌어안고 회춘한다. 쇼헤이는 <간장 선생>을 통해 무슨 말을 하는가? 집단의 광기(전쟁)을 거부하고 개인의 욕망(성욕 혹은 생명)을 추구하라.

ps.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됐는가? 토루미는 모르핀을 훔치다가 실수로 죽는다. 그의 죽음은 허망하다. 약물 중독자의 최후가 그렇다. 이는 약물(모르핀)이 구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스님 우메모토는 마누라를 잃는다. 군대에서 조사받고 집에 오니 산키치가 제자가 되겠다고 앉아 있다. 마누라는 도망한 듯하다. 우메모토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술에 의존한 자의 최후도 좋지 않다. 군의부장 이케다는 그래도 낫다. 그는 유곽 마담을 얻는다. 문제는 하기도 전에 쌌다는 것이다. 그는 원하던 여자 앞에서 힘을 못 썼다. 그는 일본 군대를 대변하는데, 일본 군대가 얼마나 실속 없는지 알 수 있다. 성공하는 자는 아키기뿐이다. 아카기는 늙은 나이에 어린 여자를 얻었다.
ps. 성과 힘을 환기하는 장면을 덧붙인다.

밤(The Night)

적어도 세 번은 봐야 이해된다. 한 번 보고는 모른다. 안토니오니는 디테일의 신이므로 숨기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의 영화가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여도 실은 다 의도된 것이다. 허무한 행동과 무의미한 대사를 지나치지 마라. '뭐지?'라는 물음이 '아!'라는 감탄으로 바뀔 때까지 봐야 한다. 그 순간 알게 된다. 안토니오니가 괜히 거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드는 영화마다 왜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했는지를.
안토니오니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현대인의 고독, 우울, 소외, 좌절, 허무 따위. <Blow-Up>만 제외하면 거의 그런 듯하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권태기에 빠진 부부를 통해 소외된 인간성과 좌절된 사랑을 그렸다. 하고픈 말은 대단하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대단하다. 형식 측면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안토니오니가 형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사실주의로 형식주의를 압도한다. 그의 사실주의적 형식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다. 이렇게 튀지 않게 구조를 짠 감독이 있던가? 고다르? 타르코프스키? 브뉘엘? 본 영화가 적은 탓인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없다. 그의 영화는 처음에는 모호하지만 볼수록 또렷해진다. 촘촘한 구조가 평범한 일상과 융합되어 있다. 티가 안 나는 점이 매력이다. 서투른 감독일수록 티가 나기 마련인데 그는 다르다. 진정한 거장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그의 실력에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세상에. 일전에 교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안토니오니는 굉장히 지적인 감독입니다." 그 말이 맞았다. 형식도 지적이고 영화 분위기도 지적이다. 흑백 화면은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보는 것만으로 눈이 즐겁다. 여담이지만, 나는 형식주의자를 싫어한다. 대표적으로 팀 버튼. 팀 버튼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가 훌륭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나도 모두의 평가에 동감한다. 그는 자기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의 형식이다. 엄밀히 말하면, 형식주의다운 형식. 한마디로, 나는 형식주의 영화가 싫다. 꾸미고, 덧붙이고, 과장하는 영화는 질색이다. 있는 대로 사실을 표현한 영화가 좋다. 극영화와 사실주의의 언저리를 멤도는 영화. 영화를 '사실'과 '형식'으로 나누자면 안토니오니는 전자에 속한다. 오즈와 브레송도 그렇고. 때문에 나는 이 셋을 사랑한다. 이들은 내가 바라는 시네아티스트이다. 몇 명 추가하자면 큐브릭, 브뉘엘, 홍상수도 포함(큐브릭은 형식주의에 가깝고, 브늬엘은 아방가르드에 가깝지만).
어젯밤에 보고 오늘 계속 봤다. 총체적으로 세 번 봤다. 이해되지 않는 장면은 앞뒤를 살펴 분석했다. 3초씩 끊어서도 보았다. 아직도 불가해한 부분이 많다. 아는 데까지 지껄여보겠다.
첫 장면에 도심이 등장하고 크레딧이 뜬다. 왜 도심일까? 안토니오니 영화에 익숙한 사람을 알 테다. 그는 삭막하고 차가운 도심을 통해 인간 소외를 다룬다. 도시와 인간은 대비되고 말소된 인간성은 부각된다. 이는 그의 주제의식과도 상통한다.
건물 외벽이 화면 전체를 차지한다. 인간은 구석에 조그맣게 보인다. 거대한 건물 앞에 인간은 보잘것없다. 이런 숏은 안토니오니의 전매특허다. <정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미미한가. 단조로운 흑백 화면은 그 정도를 심화한다. 이 영화는 1960년에 개봉했는데 그때는 컬러가 상용되던 시점이었다. 안토니오니는 일부러 흑백으로 찍은 것이다. 소외된 인간과 차가운 도시를 표현하려고. 만약 컬러로 찍었다면 영화가 지닌 쓸쓸함은 약화했을 것이다.
죠반니와 리디아가 병문안 가는 장면. 그들은 차에 타고 있다. 철근 구조물이 차에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다. 다행히 그들은 구조물을 비켜 간다. 이 장면은 설정숏에 가깝다. 그만큼 비중이 적다. 없어도 될 만큼 무의미한 장면 같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이것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감독이 괜히 넣을 리 없다. 그것도 철근 구조물까지 준비해가면서. 이 장면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죽음이다. 현대사회에 도처한 죽음의 그림자를 뜻한다. 이 시퀀스에 등장하는 토마소의 입원(그는 나중에 죽는다)을 생각해보라. 죽이 맞지 않는가? 더군다나 그들은 병원에 입원한 토마소를 찾아가고 있다. 이는 감독이 죽음을 의도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현대인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에 내몰렸다. 우리는 죽음을 간과하며 산다. 감독은 철근 구조물을 통해 죽음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죽음의 이미지는 나중에도 등장한다.
죠반니와 리디아는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를 만난다. 의사는 말한다. 수술은 하지 않았다고. 현 시점에 소용없다고. 토마소가 죽을 것이라는 말이다. 토마소는 두 친구(죠반니와 리디아)에게 거짓말한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리디아가 밖에 나와 운 이유는 이 때문이다.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가니 얼마나 슬펐을까.
죠반니와 토마소의 대화에 아도르노가 언급된다. 토마소가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식인' 개념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영화가 비판하는 것이 지식인과 부르주아니까. 영화는 토마소가 지식인이라는 것을 알리려고 투숏 앵글에 책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쪽은 토마소의 얼굴, 다른 쪽은 쌓인 책들.
죠반니의 소설. 제목이 'stagione'다. 이탈리아어인데 뜻은 '계절'이다. 왜 계절일까? 계절은 곧 변화다. '변화'는 영화를 통괄하는 개념인데, 죠반니와 리디아의 사랑이 변하는 것과 토마소의 운명이 삶에서 죽음으로 변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다른 대사에서도 '변화'가 등장한다. 옛 동네를 구경하는 장면에서 죠반니는 말한다. "이상하군. 하나도 안 변했어." 리디아가 말한다. "머지않아 변할 거예요."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 계절처럼 변한다. 사랑도 운명도. 우리는 영원성을 붙잡으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두 지식인(죠반니와 토마소)은 병원에서 여자를 경험한다. 토마소는 샴페인을 갖다준 간호사에게 집적댄다. 그녀의 미모를 칭찬하기도 한다. 별 의미 없는 것 같지만 여자 없이 못 사는 남자의 숙명을 보여준다. 이는 죠반니를 통해 명백해진다. 죠반니는 병실을 나오다 아까(병실 들어가기 전에) 만났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죠반니를 유혹하고 함께 병실에 들어간다. 죠반니는 이성을 잃고 그녀와 침대에 눕는다. 지식인이라도 얼마나 쉽게 유혹에 넘어가는지 알 수 있다. 남자는 똑똑하든 무식하든 여자 앞에서 매한가지다. 재밌는 점은 여자의 정체다. 죠반니를 유혹했던 그녀는 뭔가 이상해 보인다. 정신병자 같은데 확증이 없다. 이는 병실에 놓인 물건을 통해 유추된다.
죠반니와 여자가 키스하는 장면. 중요한 것은 키스가 아니라 옆에 보이는 물건이다. 심도가 얕아서 불분명하지만 저것은 인형이다. 강아지 인형. 그녀는 정신연령이 낮을 확률이 높다. 인형 따위가 저기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저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다음 장면을 보자.
여자가 침대에 누웠다. 죠반니도 꼴린 상태. 시선을 올려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옷장 위에 인형이 보이는가? 그것도 두 개나. 이는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다. 소품이 반복된다는 것은 감독이 노렸다는 뜻이다. 안토니오니의 꼼꼼함이 엿보인다. 그녀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충 답이 나왔다. 인형이 있는 것으로 봐서 정신이 덜 성숙한 환자일 리가 높다. 정신병 환자인데 성욕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죠반니를 보고 그를 유혹한 것이다. 그녀는 종교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 듯하다. 간호사가 그녀를 진정시킬 때 벽에 걸린 이콘이 보인다. 안토니오니는 병원과 종교를 '억압'으로 보는 듯하다. 죠반니의 성욕도 그녀의 성욕도 아무 문제가 없다. 있다면 두 사람이 장소를 잘못 선택했다는 것 정도. 유부남인 죠반니의 도덕성도 지적할 만하고. 어쨌든 그녀의 성욕에는 문제가 없다. 종교와 병원이 욕망을 억압할 뿐이다.
출판기념회에 간 리디아는 적응하지 못한다. 남과 어울리지 못한다. 그녀는 혼자다. 결국 밖에 나와 거리를 배회하는데, 이 부분이 중요하다. 처음에 중요한 줄 몰랐는데 한 누리꾼이 쓴 글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가 책에서 읽었다고 했다. 리디아가 방황하는 시퀀스가 에로스를 찾는 여성의 심리를 표현한다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는 이 해석에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았는데 해석에 동조하게 되었다. 리디아의 방황은 에로스의 갈구가 맞다. 리디아는 남편의 식은 사랑을 보상받으려고 거리를 배회한 것이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
리디아가 방황하는 시퀀스에 나오는 장면들. 짧은 숏들인데 모두 남성과 관련한다. 리디아는 길에서 남성을 힐끗한다. 여자와 마주치는 경우는 없다. 엄밀히 말하면 여자와 두 번 만나는데 이는 그와 상관없다. 여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리디아가 남자를 힐끗한다는 것은 남성을 갈구한다는 뜻이다. 남자가 길에서 여자만 쳐다보는 것과 똑같다. 길에 세워진 돌기둥을 보라(다섯 번째 장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리디아는 친절하게도 이것을 손으로 만지며 지나간다. 영화에서 접촉과 지시는 큰 뜻을 갖는다.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고추가 확실하다. 다음 로켓을 보라. 로켓도 모양이 거시기하다. 심지어 로켓은 발사되기까지 한다. 리디아가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짐작된다. 재밌게도 리디아는 발사된 로켓을 본 뒤 죠반니에게 전화한다. 자기를 데리러 와 달라고. 길에서 만난 두 여자는 무엇인가? 처음 만나는 여자는 꼬마 아이다. 아이는 폐허에서 울고 있다. 엄마도 없고 보호자도 없다. 이는 리디아의 처지와 동일하면서 그녀의 심정을 대변한다. 리디아도 꼬마처럼 혼자고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 꼬마의 울음은 리디아의 심정과 동일하다. 다음에 만나는 여자는 할머니다. 그녀는 고추를 상징하는 돌기둥에서 무엇을 먹는다. 리디아는 그녀를 비켜 지나간다. 이 또한 리디아의 외로움을 상징한다. 꼬마가 그랬듯이 할머니도 리디아의 자아다. 다르게 해석하면, 꼬마 - 어른(리디아) - 할머니로 이어지는 세월을 통해 인간은 언제나 혼자라는 사실도 유추된다. 실제로, 연회에서 만난 친구는 결혼했느냐는 질문에 답한다. "아니. 혼자 살아. 혼자 태어났잖아."
영화에 헬기와 제트기 소리가 등장한다. 총 세 번.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소음이다. 기계와 문명이 만든 소음. 소음은 침묵을 방해한다. 현대인은 소음 탓에 평정을 잃는다. 발렌티나(모니카 비티)가 죠반니에게 들려준 녹음을 들어보자. "개 짖는 소리가 떠오르고, 그 다음 비행기 소리를 들은 것 같아요. (중략) 침묵은 내 평화를 방해하는 외부 소음에 깨졌어요." 외부 소음 탓에 인간 내면이 파괴된 상황. 인간성 상실이라는 영화 주제와 상통한다. 다른 해석은 죽음이다. 앞서 말했듯이 죽음은 곁다리 주제인데, 헬기와 제트기 소리를 통해 죽음이 암시된다. 왜냐? 헬기와 제트기는 전쟁을 환기하고 죽음의 공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간파할 미장센. 죠반니가 베란다에서 이웃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철장은 그것이 무엇이든 감옥을 환기한다. 왼쪽에 새장이 보이는가? 새장에 갇힌 새와 철장에 가린 죠반니를 비교하자. 영화는 전 장면을 통해 철장에 가린 이웃도 역앵글숏으로 보여준다. 감독의 의도야 뻔하지 않은가. 현대인에게 보금자리조차 감옥이라는 뜻이다. 친절하게도 죠반니는 철장을 부여잡고 이웃은 새에게 먹이를 준다. 안토니오니는 그렇게 연기하라고 배우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분명하다. 영화에서 접촉은 큰 뜻을 갖는다. 새장을 이용한 미장센은 다음에도 등장한다.
연회장에 도착한 죠반니와 리디아. 죠반니는 책 한 권을 발견하고 말한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몽유병자>를 읽은 사람이 있을까?" 이는 부르주아의 무지無知를 비꼬는 말이다. 이제 영화는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을 조롱하는 데 주력한다. 책 제목은 왜 '몽유병자'일까? 이때는 밤이다. 사람들은 자지 않고 연회를 즐긴다. 즉, 몽유병자는 그들, 부르주아를 뜻한다. 죄다 병에 걸린 환자라는 뜻이다. 이것도 안토니오니의 조롱이라면 조롱.
꽃밭에서 한 남자(CEO)가 여자에게 장미를 주면서 부하에게 말한다. "앙트완, 필립포한테 화단 정리 좀 하라고 해. 장례식장 같잖아." 장례식장. 죽음의 이미지가 환기된다. 안토니오니는 대사를 허투루 쓰지 않는다. 한 교수는 안토니오니 영화를 보며 대사 쓰는 법을 익히라고 했다. 이쯤 되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된다. 그는 대사도 꼼꼼하게 쓴다.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다면 대사에 경청하라. 다른 대사를 살펴보자. 루시라는 여자가 애호가(fan)라며 죠반니에게 접근한다. 루시는 말한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소설을 좋아해요. 하지만 남자는 여자의 지성과 개성을 좋아하죠. 두 사람은 같이 살죠. 하지만 이야기를 어떻게 끝내죠?" "여자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강인한 여자가 되겠죠. 그녀는 다른 여자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요." 두 대사를 통해 줄거리가 요약된다. 여기서 남자는 죠반니고 여자는 리디아다. 다른 여자는 발렌티나다. 이 대사는 복선 역할을 한다. 죠반니와 리디아가 헤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리디아의 이별이 자기 희생이 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은 스포일러다.
죽음을 환기하는 장면. 이후에 죠반니 부부가 사장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데, 리디아가 말한다. "몇 년 전에 자살하려고 했어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말해줘요, 죠반니." 죠반니가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다는 뜻이다. 현대인은 늘 죽음과 함께한다. 앞서 살펴본 죽음에 관한 설정이 반복된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죽음을 계속 환기한다. 이는 비 오는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이때는 집단 자살 수준이다. 아래 장면을 보자.
처음 장면은 무셰트와 맞먹는다. 실은 비가 오니까 기분 좋아서 물에 빠진 것이지만 속뜻은 죽음이다. 쾌락과 흥분의 이면에 죽음 충동이 있다. 모두 물에 뛰어들고 누운 자세로 비를 맞는다. 신기하게도 이전에 이 신(비오는 신)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리디아가 방황하는 시퀀스에서.
리디아가 분수대를 보고 있다. 이 장면은 비 오는 신에 대한 복선이다. 억측이라고? 과연 그럴까? 나는 안토니오니가 의도했다고 본다. 확신한다. 왜 굳이 분수대 장면을 넣었겠는가? 그냥? 안토니오니 영화에 '그냥'이란 없다. 이것도 다 노린 것이다.
최고로 꼽는 디테일. 이것을 발견하고 나는 경악했다. 세상에 이런 디테일을 쓰다니. 안토니오니의 디테일 실력에 개거품을 물었다. 새장이 또 나왔다. 새장은 감옥을 상징한다. 감옥에 갇힌 새는 불쌍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유 없이 억압된 존재다. 카메라는 새장을 비춘 뒤 두 여자의 걸음을 따라 패닝한다. 다음 장면에서 멈추는데, 발렌티나의 엄마(밝은 옷)가 돈지갑을 자랑한다. 문제는 돈지갑이 아니라 인원수다. 그들은 몇 명인가? 다섯이다. 패닝 전 화면으로 돌아가서 새장에 갇힌 새를 세어보라. 위에 셋, 아래 둘, 합쳐서 다섯. 컷으로 끊지 않고 동일성을 유지한 패닝. 소름 돋는다. 더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찬양.
부르주아에 대한 조롱은 대화 장면에서 드러난다. 사장은 부부와 함께 대화할 때는 예술 정신을 강조하지만 죠반니와 둘이 있을 때는 돈을 중시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필연이 아니라 이득이었다. 부부랑 대화할 때는 필연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연회장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돈과 능력에 대해 얘기한다. 리디아의 친구는 남자를 재력으로 평가한다. 로베르토를 거물이라며 소개하려고 하지만 리디아가 거절한다. 이외에도 많다. 헤밍웨이를 언급한 늙은이는 지식인도 돈을 멸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는 죠반니를 겨냥한 말이다.
영화는 롱숏으로 끝난다. 키스하는 남녀의 몸은 패닝으로 밀리고 썰렁한 자연이 자리를 대신한다. 그 썰렁함은 남녀의 미래일 것이다. 현대사회에 영원한 것은 없다. 현대인은 영원성을 붙잡지 못한다. 변하는 계절처럼, 사람도 무상하고 인생도 무상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소외, 기계문명, 속물근성, 죽음충동은 허무와 패배만 남긴다. 평범한 일상에 숨은 염세주의.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그렇다.

ps. 안토니오니는 천재가 맞군.
ps. 모니카 비티가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 깊다. 영화는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보다 멋진 등장 신은 없다. 우리는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녀가 모니카 비티인지 안다.
ps. 잔느 모로 vs. 모니카 비티 - 모니카 비티 승(사견)
ps. 죠반니와 리디아가 아침에 나올 때 벤치에 한 여자(레시)가 울고 있던 이유. 부르주아 된장녀의 패배일 수도 있고 남자 관계 때문일 수도 있다. 연회장에서 그녀는 죠반니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다른 남자와도 어울린다. 그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리디아와 사장 부인이 고양이를 쳐다볼 때 '바람둥이'라 불리는 늙은이가 레시를 떼어낸다. 늙은이는 말한다. "저리 가, 레시. 날 내버려 둬." 아마 레시는 연회장에서 돈 많은 남자 낚을 생각이었나 보다. 그에 실패해서 울었을 확률이 높다. 레시가 울면서 하는 말을 들어보자. "무시해. 내가 바보 같아서 우는 거야."

일출(Sunrise)

무르나우가 헐리우드로 건너가 만든 영화.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영화다. 왜? 카메라 이동이 다양하기 때문에. 무성영화에서 카메라가 이동해봤자 얼마나 이동하겠냐,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개 무성영화가 고정-롱숏을 고집한 것에 비해 이 영화는 페디스털도 하고 달리도 하고 트러킹도 하고 줌도 한다. 물론 실제 페디스털, 실제 달리, 실제 트러킹, 실제 줌은 아니다. 보기에 비슷하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영화에 카메라 이동의 원형이 담겨 있다. 현재 정립된 카메라 이동은 여기에 기원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무성영화답지 않은 무성영화다. 형식 측면에서 한 걸음 내딛은 영화다. 무르나우가 표현주의 대가답게 형식으로 승부를 본 것이다. 결과는 승리. 바쟁이 열 손가락에 꼽는 영화라고 한다. 장면을 보며 미장센과 카메라 이동을 살펴보자. 내용 면에서는 할 말이 없다. 그냥 부부의 얘기다. 남편은 바람났다가 정신 차리고, 아내는 조강지처로 마음고생 하다가 부부애를 되찾는다. 뻔하디 뻔하다. 드라마 시나리오로 써도 될 법하다. 그러니 우리는 형식에 치중해야 한다.
촌스럽지만 당시에 획기적이었을 다중노출. 휴가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영화에 다중노출이 빈번히 등장한다. 지금 보니까 엄청 촌스럽다. 쉴드 쳐줄래야 쳐줄 수가 없다.
배를 타고 농촌에 도착한 도시 사람들. 카메라는 높아지면서 농촌 전경을 아우른다. 나는 이것이 페디스털 업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무르나우가 실제 페디스털을 썼을 리는 없다. 어떻게 찍었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페디스털이 탄생한 듯하다.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자주 본다. 주인공이 새로운 장소에 당도했을 때 카메라는 주인공 머리 뒤로 올라가며 전체를 비춘다. 장대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깔리면서. 서부극에서도 종종 나오는 듯하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페디스털도 하고 틸트 다운까지 한다. 물론 의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카메라가 흔들리다 보니까 어쩌다 그런 효과를 냈을 테지. 페디스털 숏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무성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기란 쉽지 않다.
이 한 장면으로는 의미가 없다. 이동 숏이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남편을 꼬득이는 바람녀다. 바람녀가 남편을 만나러 가는 장면인데, 카메라는 그녀를 비추며 쫓아간다. 사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들고 찍었는지 모르지만 움직임이 안정적이다.
바람 피우는 장면 다음에 아내가 아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자세가 비슷한다. 둘 다 포옹 자세. 비슷한 이미지를 중첩해서 교차편집에 재미를 주고 있다.
이것은 삽입자막의 진화다. 문장이 끊겨 있다. 다음 들어올 단어는 'drowned'이다. 긴장감을 위해 일부러 나중에 보여준다. 바람녀가 도시로 도망치자고 하자 남편이 아내는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다. 이것이 바람녀의 대답이다. "당신의 아내는 물에 빠뜨려버려요." 동사 drowned를 늦게 보여줌으로써 어감이 주는 효과가 상승한다.
말뜻처럼 자막도 물에 빠지듯 사라진다. 사견인데, 촌스럽다. 나는 영화 형식은 간단명료할수록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위 자막은 효과적이기는 하나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자막이든 영상이든 평범한 것이 최고다.
아내를 살해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집에 들어가는 남편. 벽에 비친 나무 그림자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다.
아내를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남편. 뒤에 다중노출로 바람녀의 모습이 보인다. 당시에는 참신했겠으나 지금은 그리 멋있지 않다. 배우 표정만으로 심리를 표현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남편을 유혹하는 미용사(위)와 아내(아래)의 모습을 비교하자. 흑과 백의 대비가 뚜렷하다. 머리 모양도 대비된다. 미용사는 검은 머리가 곱슬하지만, 아내는 금발(흑백영화이므로 백색) 머리가 단정하다. 색의 대비는 이제 흔해서 식상하다. 당시에 이런 방식은 유용했을 테다. 이것은 나중에 헐리우드에서 스테레오타입으로 정착한다. <블랙 스완>에서도 이 방식이 활용된다. 나탈리 포트만이 백조에서 흑조로 변할 때 옷 색깔을 보라. 중간에 과도기를 상징하는 회색까지 등장한다. 나탈리 포트만이 회색 옷을 입었을 때 나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너무 티 나잖아.
술에 취한 돼지의 얼굴 클로즈업. 대박이다. 술에 취한 얼굴이라니. 눈 풀린 것 봐라. 그 어느 클로즈업보다 위대하다. <잔 다르크의 수난>의 팔코네티만큼, <비브르 사비>의 카리나만큼 파급력 있다. 돼지 얼굴은 도상학적으로도 아름답다. 당시 클로즈업 수준은 현대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없다.
돼지가 나왔으니 장르 얘기를 하자. 부부는 무도회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게임으로 사육되던 돼지가 도망쳐 나와 무도회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여기서 장르는 드라마에서 코미디로 변한다. 이 시퀀스에서는 부부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주목되면서 재밌는 장면이 부각된다. 돼지가 지나가면서 여자들이 놀라 다리를 든다든지, 남편이 돼지를 잡으려고 천을 걷혔는데 남녀가 뽀뽀하고 있었다든지, 여자 옷이 흘러내려 남자가 올려줬는데 계속 흘러내리니까 벗겨버린다든지 등. 여기저기 들쑤시며 말썽 피우는 돼지는 채플린을 환기한다. 이 시퀀스 자체가 채플린 개그와 상통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아내가 물에 빠지자 남편이 절망하고 침대에 엎드려 있다. 이 장면을 지나치면 안 된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찾아야 한다. 무엇을? 뻔하다면 뻔할 수도 있는 미장센. 바로 그림자. 벽에 비친 그림자와 침대에 비친 그림자를 보자. 어떻게 생겼는가? 십자가 모양이다. 절망에 빠진 남편이 침대에 엎드린 상황과 통한다. 십자가 모양 그림자를 통해 남편이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내가 생존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십자가 그림자는 절실함을 부각한다. 이는 서양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종교 코드다. 그들은 늘 마지막에 종교를 찾는다. 종교를 해답으로 제시하는 영화도 많다. 신성 없이 서양은 버틸 수 없는 것이다.

ps. 특기할 점: 융합된 장르, 미장센과 카메라 이동, 표현주의와 헐리우드의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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