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다. 홍상수 애호가들은 이 영화를 극찬한다. 처녁작이라 그런지 대접도 극진하다. 나는, 홍상수식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서 좋아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여기서 무분별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까지 선보였다. 그답지 않다. 홍상수식 카메라는 고정-롱숏-롱테이크가 진수 아닌가. 내가 <강원도의 힘>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다. <강원도의 힘>은 고정-롱숏-롱테이크의 진수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간을 관찰만 하고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끝까지 관찰자로 남는다. 클로즈업도 몇 번밖에 쓰이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인물이 전화하는 장면까지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카메라가 덜 각성했다고 볼 수 있다. 광각렌즈 또한 홍상수답지 않다. 왜곡된 화면은 일상보다 꿈에 가깝다. 나는 홍상수의 진정한 시작은 <강원도의 힘>이라 생각한다. '돼지'는 초기 실험작 정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훌륭하다. 나 같은 문외한이 무얼 알겠는가. 평론가 말에 따르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한국 영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축복이다. 기존 영화문법을 전복한 천재적 작품이다.
1. 정체성
홍상수를 설명할 때 일상을 들먹이며 브레송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헛소리다. 브레송 영화를 한 번이라고 봤다면 그런 소리 못 한다. 브레송과 홍상수는 양극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작품 세계를 논한다면, 브레송은 성스럽고 홍상수는 속스럽다. 성과 속을 구별한다면 그렇다. 브레송은 종교에 심취해 구원을 추구하지만 홍상수는 속세에 짓눌려 구원을 단념한다.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브레송의 인간은 무겁고 진지하다. 그 정도가 심해서 나중에는 감정이 탈색되기까지 한다. 후기작을 보라. 그들은 나무처럼 뻣뻣하고 시체처럼 무감각하다. 홍상수의 인간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아이처럼 유치하고 동물처럼 충동적이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우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브레송이 아니라 브뉘엘에 가깝다. 브뉘엘의 속물들은 홍상수의 조상이다. 영화 형식도 살펴보자. 브레송은 롱숏을 거의 쓰지 않는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미디엄숏과 클로즈업만 보인다. 그는 설정숏도 쓰지 않는다. 시간과 장소는 관객이 알아서 유추해야 한다. 클로즈업은 인물을 절단해 즉자존재로 전락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은 사물과 차이가 없다. 즉자존재인 인간은 허무한 세상의 부속품이다. 때문에 운명을 개척할 힘도 없고 힘이 없으니 구원도 없다. 인간은 악이 점령한 세상에 휩쓸려갈 뿐이다. 허무와 절망. 브레송은 그것만 말한다. 그의 인간들은 탈속해 천국을 갈망하지만 지옥에 추락한다. 그리고 영화는 자막 없이 막을 내린다. 여기에 음악도 없고 해설도 없다. 관객은 컴컴한 영화관에서 허무와 절망만 느끼고 자리를 뜬다. 홍상수는 염세적이되 절망적이지는 않다. 그는 <하하하>에서 세상을 밝게 보기로 결심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두워도 긍정을 잃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의 인간들은 유치하고 비루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브레송처럼 살해되거나 자살하는 경우는 없다. 고정-롱숏-롱테이크는 인간을 관찰하면서 키득거린다. 가끔은 줌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개입이 아니라 집중이다. 카메라는 인물에게 개입하지 않고 자유를 허락한다. 인물은 자유를 보장받고 리얼을 극화하면서 대자존재임을 증명한다. 브레송과 다르게 그들은 활동적이다. 인물과 배경, 인물과 사물의 경계는 뚜렷하다. 홍상수의 카메라 안에서 그들은 운명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탈색된 언행도 없고 탈색된 감정도 없다. 그들은 진짜 언어로 말하고 진짜 감정으로 행동한다. 설정숏 또한 진부하게 존재한다. 홍상수는 여기가 어디인지 늘 알려준다. 노골적으로 간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 시간과 장소는 중요한 요소다. 브레송이 시공간을 배제해 일상의 허무를 부각했다면, 홍상수는 시공간을 부각해 일상의 허무를 배제했다. 둘은 서로 판이한 것이다. 카메라 움직임도 그렇다. 브레송의 카메라는 물 흐르듯 움직인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패닝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브레송의 카메라가 주관자라면 홍상수의 카메라는 관찰자다. 컷의 차이도 극명하다. 브레송은 아마 영화 역사상 최다 컷을 자랑할 테다. 그는 쪼개고 또 쪼갠다. 쪼갬으로써 인간과 세상을 분절해 의미를 탈락시킨다. 홍상수는 쪼개지 않는다. 중요한 물건이 아닌 이상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경우도 없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포용한다. 포용함으로써 현실성을 유지하고 그 안에 미장센을 끼워 넣는다. 이 말은 반대로 브레송에게 미장센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저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미장센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영화가 기존 영화와 다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 시네마토그래프다. 그의 인물은 배우가 아니라 모델이다. 컷과 클로즈업이 난무하는 영화에 미장센이 어디 있겠고 딱딱하고 무감각한 연기에 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가 전문 연기자를 왜 쓰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반대로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만 제외하고 전문 연기자를 썼다. 그의 페르소나는 김상경에서 시작해 김태우를 거쳐 유준상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홍상수 했을 때 브레송을 떠올리는 까닭은 인터뷰 때문인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감명 깊게 본 영화로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꼽았다. 드레이어의 <오데트>도 꼽았는데, 이런 탓에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홍상수는 브레송에게 감명 받았을 뿐 영화적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브레송과 홍상수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브레송이 공산주의라면 홍상수는 자본주의다. 위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홍상수가 영화적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브뉘엘과 안토니오니다. 홍상수는 브뉘엘의 철학에 안토니오니의 형식을 덧씌워 자기 영화를 개발했다. 그는 안토니오니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브뉘엘의 속물들을 빠뜨렸다. 어떻게 될지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속물들은 건조한 화면과 꼼꼼한 미장센 속에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우리와 같고, 카메라가 비추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다. 현실을 담지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홍상수는 멈추지 않고 여기에 우연을 첨가해 카오스적 우주를 표현했다. 그는 도인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의 카오스와 영화의 코스모스가 충돌해 제3의 세계가 태어났는데, 그것이 홍상수 영화다.
그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나 고민해봤을 테다. 확답할 수 없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이 영화에 근거가 될 만한 대사가 나온다. 효섭이 출판사를 찾아갔을 때 직원이 말한다. "저도 글을 하나 구상하고 있어요. 장자와 마르크스의 만남인데, 현대인들은 자연에서 유리되어서 살고 있죠? 더 나아가서 이데올로기의 해체로 인해서 인류의 꿈과 이상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홍상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왜 남자는 섹스에만 몰두하고, 왜 여자는 배신을 일삼고, 왜 인간관계는 지속되지 않고, 왜 희망과 구원은 없는지. 장자는 자연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의 노자와 엇비슷하고, 노자와 사상을 공유하는 철학자들은 속세의 초월과 해탈을 갈파한다. 그들의 목적은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 신선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답적 초인이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유리되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현대인은 초월하지 못하고 속세에 머물러 있다. 비인간적인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혁명가다. 그는 초월이 아니라 개혁을 갈파한다. 그는 속세를 떠나지 않고 속세에 머물러 속세를 전복해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말 그대로 꿈의 사상. 대한민국은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제대로 된 정치 개혁에는 실패했다. 친일파와 기회주의는 이름만 바꿔 집권 세력을 고수하고 있다. 자유당 - 공화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민주화 세력이 승리한 기간은 고작 10년이다. 지난 대선 때 속은 것도 모자라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또 속았다. 주가를 조작했든, 제수를 성희롱했든, 논문을 복사했든 상관없다. 경제만 살려준다면 누구라도 뽑겠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다. 이데올로기가 해체되어 꿈과 이상을 상실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초월도 없고 개혁도 없다. 그럼 무엇이 남겠는가? 속세에 사는 중생의 비열한 삶만 있을 뿐이다. 장자는 속세를 떠나 부처가 되기를 바랐고, 마르크스는 속세를 개혁해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둘 다 실패했다. 때문에 홍상수 영화에는 종교 얘기와 정치 얘기가 없다. 나오지 않는다. 나올 수가 없다. 나오면 안 된다. 속물이 무슨 종교와 정치에 관심 있겠는가. 속물은 자기 욕망에만 관심 있다. <밤과 낮>에 기독교 얘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겉도는 소재일 뿐이다. 주인공은 성경에 심취해 삶을 바꿔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속물 근성 앞에 무너진다. 결국 홍상수가 하고픈 말은 '속물-보기'다. 자연에서 유리되어 이데올로기 없이 속세를 떠도는 현대인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실망하고, 키득대고, 반성한다. 홍상수 영화의 정체성은 그러하다.
2. 돼지의 일상
효섭은 삼류 소설가다. 그는 옥탑방에서 근근이 산다. 아침에 외출하면서 이웃집 열매를 따 먹는다. 영화는 그 열매를 보여주면서 시작되는데, 열매는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과를 뜻한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됐다. 효섭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그가 악인이 되었다는 뜻이고 앞으로 펼쳐질 일상이 낙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음과 동시에 세상은 비분법이 아니라 이분법의 세계가 되었다. 인간은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받는다. 앞으로 전개될 얘기도 그럴 것이다. 선악과의 의미를 부각하려고 영화는 곳곳에 기독교와 관련된 사물을 배치했다. 맨 위에 보면 효섭의 집 너머로 교회가 보인다. 화분 옆에는 전시주 혹은 안테나가 보이는데 십자가 모양을 닮았다.
효섭은 출판사에 들러 후배와 애기를 나눈다. 원고 읽어봤냐는 질문에 후배는 바빠서 못 읽었다고 답한다. 효섭은 바쁜 후배의 직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삐친다. 현대인은 이렇게 속이 좁다. 후배는 모자를 쓰고 있다.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모자는 일종의 권력으로 감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모자를 썼다는 것은, 감투를 썼다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효섭은 소설가고 후배는 출판사 직원이다. 후배는 효섭의 원고를 읽고 출판할지 말지 결정하기에 효섭보다 지배적 위치에 있다. 모자는 그런 지배적 위상을 나타내는 소품이다. 모자는 나중에 또 나오는데, 그때는 잘나가는 동기가 쓰고 있다. 효섭은 삼류 소설가이기에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잘나가는 동기의 우월감은 모자로 표현된다. 모자는 곧 벼슬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원고에 뭐가 묻는다. 이는 복선이다. 효섭은 후에 고깃집에 가는데, 직원이 실수로 옷에 김치를 쏟는다. 원고에 뭐가 묻고 옷에 김치가 묻고. 두 설정은 상통한다.
효섭은 카페에서 민재를 만난다. 민재가 아침 먹었냐고 묻는다. 효섭은 안 먹었다고 고개를 젓는다. 방금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면서 안 먹었다고 거짓말한 것이다. 그만큼 자기가 밥 굶을 정도로 노력하는 소설가라는 뜻이다. 결국 허세지만. 효섭은 민재가 원고를 읽는 동안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운다. 그는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벌레 한 마리를 괴롭힌다. 그 벌레는 민재를 뜻한다. 효섭은 벌레를 괴롭히듯이 민재를 이용해 먹고 있다.
민재가 원고 읽은 소감을 말한다. "특히 그 여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죽는 거요. 거기선 그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 남자의 배신을 보고선 가만있을 여잔 없을 테니까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흘려들으면 낭패 본다. 민재 말에 따르면, 원고에서 마지막에 여자가 죽는다. 이는 보경의 죽음을 뜻한다. 영화 마지막에 보경이 신문을 바닥에 깔고 베란다로 나간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해설도 붙이지 않고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보경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재의 말은 영화 결말에 대한 해석이자 복선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여자'는 보경이 틀림없다. 다른 단서를 찾아보자면, 민재는 자기라면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남자의 배신이란 효섭의 양다리다. 효섭은 보경과 사귀면서 민재와 만나고 있다. 후에 민재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화나 효섭에게 따졌다가 뺨 맞고, 자기를 좋아하는 민수와 섹스한다. 반면에 보경은 효섭을 용서한다. 그녀는 효섭과 여행을 떠나려고 짐까지 싸서 집을 나오고, 만나지 못한 그에게 편지까지 남긴다. 보경은 효섭을 용서한 것이 맞다. 그럼 정리해보자. 민재가 원고를 읽고 한 말에서 자기는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했고, 배신을 보고 가만있을 여자는 없다 말했으니, 민재는 효섭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 되고 복수 심리에서 민수와 잤으니, '가만있지 않는' 여자는 죽지 않는 것이 된다. 설명이 복잡한데 다시 말하면, 배신을 보고 가만있지 않는 여자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고에서 여자는 죽고 그 여자는 배신을 보고서 가만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만있는 여자는 죽는다. 배신을 용서한 여자는 죽는다. 민재는 배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여자라 자기 같았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때문에 원고에서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자살을 뜻한다. 보경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보경은 효섭의 배신을 용서한다. 그녀는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는 여자다. 그러니 민재의 소감에 따르면, 보경은 죽는다.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는 여자는, 배신을 용서한 여자는 원고에서 죽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보경이 신문을 깔고 베란다로 나간 까닭은 자살 때문이다. 보경은 자살한 것이다.
민재의 소감을 들은 효섭은 눈이 커진다. 남자의 배신에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효섭은 거짓말을 둘러대고 자리를 뜬다. "어떡하지? 난 지금 가야 되는데. 모르는 출판사인데 자꾸 만나자 그래서." 출판사에 가는 것은 맞지만 모르는 출판사가 자꾸 만나자고 한 적은 없다. 남자는 허세 빼면 시체다.
효섭의 물주인 민재는 음료 값도 계산하고 효섭에게 2만 원을 꾸어준다.
효섭은 보경을 만나 모텔에 간다. 보경은 왜 당신이 돈을 냈느냐고 말한다. 방 값을 효섭이 계산한 모양이다. 효섭은 말한다. "나도 돈 있어, 가끔." 그 돈은 민재가 꾸어준 2만 원이다. 보경은 과일을 씻으며 말한다. "당신 어러셔부터 과일 좋아했어요?" 여기서 과일은 욕망을 뜻한다. 과일은 선악과도 되고 욕망도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에 가깝다. 효섭은 욕망에 충실한 속물이다. 보경이 유부녀이기에 효섭은 마음이 괴롭다.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자는 생각에 누가 편할 수 있을까. 효섭은 남편이랑 섹스하냐고 보경에게 묻는다. 역시 남자는 욕망 덩어리다. 속물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르는데 자꾸 만나자고 하는 출판사에 온 효섭. 한 직원이 생수통을 까고 정수기에 꼽는다. 무의미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벽에 보면 백두산 천지 사진이 걸려 있다. 현대인은 천지에 갈 수 없기에 사진으로 구경한다. 직접 경험을 간접 경험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는 자연에서 유리된 현대인을 의미한다. 천지는 실존하는 장소인데도 사진으로 복사되고 유통된다. 우리는 천지를 사진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다. 생수통과 정수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자연 물이 아니다. 인공 물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까지 사 먹는 나라가 되었다. 효섭의 원고 제목은 '건강한 물에 건강한 미인'이다. 물이 반복되면서 천지와 생수통과 정수기를 상기시킨다.
효섭의 원고지에는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 효섭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 원고지쯤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인의 소유욕과 관련된다. 현대인은 내 것을 좋아한다. 뭐든지 이름을 붙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효섭이 보경과 모텔에서 섹스할 때도 효섭은 말한다. "내 꺼라고 말해줘. 내 꺼지?" 보경은 말한다. "당신 꺼에요."
효섭은 자기가 대학 모임에 연락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후배가 효섭에게 사과하며 모임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데, 이 부분이 백미다. 꼼꼼한 관객이라면 알아차렸을 테다. 모임을 연락한 후배가 아까 출판사에서 모자 썼던 후배라는 것을. 효섭이 후배에게 전화했을 때 후배는 전화를 받으며 말한다. "네. 도서 출판 청입니다." 되돌아가, 효섭이 출판사 들어가는 장면을 보자.
간판이 작아서 글자가 희미한데, '도서출판 청'이라고 쓰여 있다. 모자 썼던 후배는 전화 받은 후배가 맞다. 아까 출판사에서 효섭은 후배에게 인사동에서 술 마시자고 했다. 후배는 약속이 저녁에 있다며 다음에 마시자고 했다. 저녁에 있는 약속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학 모임이다. 효섭이 연락받지 못한 그 모임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효섭도 대학 선배이고 대학 모임에 참석할 사람인데, 후배는 깜빡 잊었는지 바로 앞에 있는 효섭에게 약속 있다고 말하면서 모임 소식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효섭이 술 마시자고 말했을 때 후배는 대학 모임을 거론했어야 한다. 어차피 모임에 동참할 텐데 둘이 술 마실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근데 후배는 대학 모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만큼 효섭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찮고 보잘것없으니까 후배가 사전에 모임 소식도 안 알려준 것이고 술 마시자고 했을 때도 약속 있다고 말한 것이다. 후배 자신도 효섭이 대학 선배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존재의 가벼움은 모임에서 계속된다. 후배에게 전화해서 모임 시간과 장소를 전해 들은 효섭. 고깃집에서 노래하는데 텔레비전이 화면 반을 차지하고 있다. 효섭은 주도권을 빼앗기고 가장자리로 밀렸다. 그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털레비전의 흑색은 대중의 무관심을 뜻한다. 모임에 참석한 누구도 효섭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 흑색은 무서우리만큼 무감정하다. 노래 가사도 그의 존재성을 대변한다. 효섭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른다.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가사에서 효섭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가 안길 곳은 없다.
잘나가는 후배 문호가 도착하고 대중의 관심은 그에게 쏠린다. 효섭은 애초부터 무관심 대상이었다. 이 숏은 광각렌즈로 찍은 듯한데, 거리감이 왜곡되어 마주하는 자리도 멀어졌고 전경과 후경도 멀어졌다. 이는 효섭의 외로움을 배가하고 그를 더 고립시킨다. 효섭은 카메라 맨 앞에 앉았는데 맨 앞에 있는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구도의 중심은 좌측과 후측으로 쏠려 있다. 활동이 벌어지는 쪽도 좌측과 후측이다. 오른쪽 구석에 놓인 효섭은 고기만 먹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런 상황은 <극장전>에서도 나온다.
문호는 홍선(옆 여자)에게 효섭을 소개한다. "참! 처음 봤지? 김효식이라고." 효섭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존재다.
위는 효섭이 고깃집에 걸린 천지 사진을 보는 장면이고, 아래는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관광 그림을 보는 장면이다. 현대인은 자연에서 유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효섭은 천지에 가본 문호에게 천지에서 수영해봤느냐고 묻는다. 문호는 천지에 가봤지만 효섭은 가보지 못했다. 이 차이는 잘나가는 문호와 삼류 소설가 효섭의 위상을 나타낸다.
효섭은 옷에 김치를 쏟은 직원과 말다툼한다. 직원이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이 말은 고깃집 직원의 열등감과 계급 서열을 환기하며 하찮은 효섭의 존재성도 대변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지만 고깃집 직원이 나름 열등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효섭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울컥해 옷을 벗으며 물어 내라고 항의한다.
소란을 일으킨 직후 선배와 대화하는 효섭. 카메라는 둘을 부감으로 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은 관객을 우월한 지위로 격상하고 대상을 열등한 지위로 격하한다. 이 숏을 보는 우리는 신이 되어 땅을 내려다보는 듯하고 카메라에 잡힌 대상은 피조물이 되어 감시받는 듯하다. 옷 때문에 말다툼하고 싸운 효섭이나 그를 위로한답시고 허세 부리는 선배나 우리 눈에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붙어 앉은 두 사람은 불쌍해 보인다.
약식 재판에서 효섭은 괴변을 늟어놓는다. 그의 주장에는 논리가 없다. 글이 잘 팔리지 않는 소설가라고 해서 누구도 자기를 무시할 권한이 없다고 말하면서, 문학을 토론하는데 왜 고깃집 직원이 끼어드냐고 말한다. 주장과 근거에 앞뒤가 안 맞는다. 계급 폐지론을 주장해야 할 문인이 무의식적으로 계급을 옹호하고 있다. 효섭은 구류 5일을 받는다. 판사에게 항의하지만 밖으로 끌려 나가고, 화면은 민수가 한 공무원에게 판결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민수와 공무원의 대화를 들어보면 민수도 구류 5일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섭과 민수, 둘의 형량은 동일하다. 효섭은 한 아저씨에게 벌금 2만 원을 빌려주는데, 이는 인간의 얄팍한 동정심이다. 효섭은 구류 5일이지만 아저씨는 벌금 2만 원이다. 효섭의 형량이 더 크다. 형량 큰 자가 형량 작은 자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다. 이를 선행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속물의 자기 위안일 뿐이다.
이제 동우의 일상으로 넘어가자. 동우는 결벽증이다. 그는 처음부터 결벽증 증세를 보인다. 전주로 가는 버스에서 앞자리의 머리 시트를 떼고 붙이려다가 앞사람에게 한 소리 듣는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토를 한다. 양말에 토가 묻어 화장실에서 처리하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얻어 탄다.
백화점 사장과 만남이 어긋나고 동우는 헛걸음을 반복한다. 한 번은 여직원이 빵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루를 흘리고 먹어 지저분하다. 이는 동우의 결벽증과 연관 있다. 이때에도 사장과 못 만나는데 여기서 기다리겠냐는 여직원의 질문에 동우는 다시 오겠다고 나가버린다. 아마 여직원이 흘린 가루를 보고 걸음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동우는 아는 동생 인창을 만나 시간을 때운다. 인창의 차에서 동우는 차 모형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나중에 인창이 요즘 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데, 동우가 차 모형 장난감을 가지고 논 까닭은 그가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 모형 장난감은 차를 소유하고픈 동우의 소망이다.
인창은 팩스 받을 일이 있어서 동우를 데려다주지 못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거짓말이다. 동우가 가고, 인창은 아내와 섹스한다. 인창이 말했던 팩스는 섹스였다. 팩스와 섹스. 발음이 비슷하지 않은가? 본인 성욕 때문에 남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하는 현실. 이것이 속물의 세상이다.
"바로 이 교실에서만도 인체에 유해한 석면이 1.74밀리그램이나 발견됐습니다." 동우가 모텔에서 텔레비전을 켰을 때 나온 말이다. 동우는 무의식적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그는 결벽증이므로 드러운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밖을 구경하다 다방 여자를 보고, 모텔 복도에서 사랑 싸움 하는 남녀를 보고 동우는 성욕을 느낀다. 모텔 복도에서 싸우는 남녀는 효섭과 보경이 싸운 모습과 비슷하다. 동우는 창녀를 부른다. 창녀는 어두운 조명을 보고 불 왜 안 켜냐고 묻는다. 동우가 불을 켜지 않은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다. 그는 창녀를 부른 일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안다. 창녀는 이불을 왜 텔레비전에 올려 놨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결벽증 때문이다. 동우는 모텔에 처음 왔을 때 침대에 묻은 더러운 흔적을 보고 불쾌해했다.
동우는 창녀와 섹스하며 말한다. "사랑하고 싶어." 창녀도 말한다. "나도 사랑하고 싶어요." 현대인은 사랑을 갈구한다. 우리가 진짜 사랑하고 있을까?
민재와 민수의 일상을 보자. 민재가 극장에 출근했을 때 민수는 짐을 왜 밖에다 놓지 않았냐며 어느 여직원에게 잔소리한다. 이는 민재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목소리 크게 내본 것이다.
극장 사장(민수의 삼촌)이 계단에 떨어진 담배 꽁초를 주울 때 민수가 삼촌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민수가 사장한테 무슨 말을 전하는지 나오지 않지만 예측이 가능하다. 전 장면에서 민수는 민재가 사장 몰래 외출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민재가 돌아왔을 때 사장이 민재 나갔다 온 사실을 아니 둘러댈 말 준비하라고 민재에게 알려준다. 실은 자기가 사장한테 밀고했으면서 민재에게 호감을 사려고 작전을 짠 것이다. 사실관계를 종합하면, 민수는 사장한테 민재가 외출한 사실을 밀고했고, 민재는 민수가 자기를 위해 사장에게 혼나지 않게 하려고 귀띔해준 것이라 믿는다. 따지고 보면 모두 민수의 자작극이다. 자기가 밀고해 놓고 자기가 귀띔해줬다.
민재는 전자 오락실 녹음으로 7만 원을 받았으면서 5만 원 받았다고 동료에게 거짓말한다. 돈 빌려 달라고 할까 봐 액수를 낮춘 것이다. 나도 이런 적이 있다. 이런 적 많다. 돈은 자랑하는 편보다 숨기는 편이 낫다. 200을 벌면 150 번다 해야 하고, 300을 벌면 200 번다 해야 한다.
민수가 불량 청소년을 훈계하는 장면. 훈계는 하나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카메라는 그들을 부감으로 잡아 그들의 하찮음을 부각한다. 앙각으로 찍었다면 다른 느낌이 들었을 테다.
민재는 효섭이 바람 피운 사실을 깨닫고 뺨까지 얻어맞은 뒤 분식집에서 만두를 먹는다. 스토커 민수가 따라 들어오고 그도 만두를 시킨다. 같은 음식을 시킴으로써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효섭은 너를 찼어도 나는 네 편이다, 라는 뜻이다.
민재와 민수는 서로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한다. 유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애증과 배신과 바람과 치정의 반복이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위선적인 우리에게 일침을 날린다. 효섭은 민재를 때리면서 말한다. "집에 가서 더러운 곰 인형인지 토끼 인형인지 그런 거 안고 자. 너 그거 안고 자는 거 그게 순수한 거 같니? 너 순수랑 유치랑 구별 못 해?" 우리가 하는 사랑은 순수일까, 유치일까? 민재는 순수했기에, 자기는 순수하다고 생각했기에 성인 만화에 목소리를 녹음하지 못했다. 민수는 민재를 벽에다 밀치며 말한다. "순수가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민수 또한 자기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은 유치 차원을 넘어 성욕 혹은 살의나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민수는 민재와 섹스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고개를 숙여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민재를 성욕의 대상으로 생각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민재를 보지 못하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애초부터 순수가 아니라 섹스였다.
마지막은 보경의 일상이다. 보경은 늘 소통 장애를 겪는다. 효섭과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는데, 효섭은 나타나지 않는다. 보경은 메시지를 남긴다. 발화자는 존재하지만 수화자는 부재한다. 보경의 목소리는 기계로 녹음되어 화석처럼 굳는다. 민재의 오락실 녹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환전되어 기계로 녹음돼 세상을 떠돈다. 우리는 매번 그 목소리를 듣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성은 기계화해 상실되고 돈으로 치환된다. 보경이 효섭을 만나지 못해 동우에게 전화했을 때, 동우는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는다. 이것도 소통 장애와 관련 있다. 이 영화가 1996년에 개봉됐는데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2012년인 현재에도 소통 장애는 만연하다. 이것은 산업과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이다. 인간은 본래 외롭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이 유행해도 개인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은 개인이 짊어질 몫이지 남과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소매치기당해 지갑을 잃은 보경은 버스에서 자는 바람에 종점에 도착한다. 다행히 근처에서 친구가 약국을 운영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빌려준 돈이 있는데 갚으라고 말은 못 하고 친구를 방문함으로써 눈치를 준다. 친구가 약국을 운영하는 동안 보경은 2층 집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꾼다. 꿈에서 보경의 장례식이 열린다. 연락 없는 효섭이 죽지 않았을까 의심했는데 그게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꿈에서 민재도 나오고, 결벽증 탓에 귀를 씻는 동우도 나오고, 자기 가슴을 만지는 효섭도 나온다. 꿈에는 여러 욕망이 뒤섞여 있다. 나중에 보경은 장례식이 열리는 거실로 나오는데 동우는 그녀가 나오든 말든 케이크만 먹는다. 동우의 매마른 애정이 꿈에서 나타난 것이다.
보경은 친구에게 돈을 받고 약국을 나간다. 이 장면이 좀 묘한데, 둘은 작별 인사도 나누지 않는다. 보경은 돈만 받고 나가고 친구는 보경이 나간뒤 문을 닫고 인상을 쓴다.
가장 아리송한 마지막 장면을 보자. 보경은 소파에 앉아 있다. 날을 보니 아침인 듯하다. 거실에 보경 혼자 있다. 간밤에 담배 사러 나간 동우는 보이지 않는다. 시나리오에서는 동우가 담배 사러 나갔다 차 사고를 당해 죽는다고 한다. 아마 보경은 신문을 통해 동우의 죽음과 효섭을 죽음을 접했을 확률이 높다. 충격 먹은 보경은 자실을 결심한다. 신문을 바닥에 깐 행동은 일종의 유언이다. 자기가 왜 자살했는지 신문을 통해 밝힌 것이다.
3. 꼼꼼한 연출
극의 전개는 9월에서 12월까지 이어졌다. 홍상수는 달력을 화면에 세심하게 배치했다.
4번째 사진에서 달력에 26일에 동그라미가 쳐 있다. 10월 26일은 민재에게 중요한 날인 모양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오늘이 며칠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 속 그날이 26일인지 27일인지 28일인지 알 길이 없다. 홍상수는 대사를 통해 며칠인지 알려준다. 다음 장면에서 민재가 모닝콜 전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10월 26일이고요. 7시 됐거든요. 일어나셨죠?" 넋 놓고 보면 이런 대사도 놓치기 십상이다.
일상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홍상수는 엑스트라 출연에도 세심함을 발휘했다. 보경이 소매치기당하는 시퀀스에서 군인 두 명이 등장한다.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살펴보자. 이것도 숨은그림 찾기처럼 재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