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The Police)

채플린 단편을 차근차근 보기로 했다. 채플린의 초기 단편은 영화의 원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영시간도 짧아서 좋다. 대개가 30분 남짓하다. 심심할 때나 기분 전환할 때 보면 괜찮을 듯하다. 무성영화라 번역도 불필요하다. 그냥 보고 즐기면 된다. 무성영화는 말이 없으므로 만국에 통용된다. 채플린의 슬랩스틱은 만국 공통어다.
<경찰>에는 채플린의 세계관이 많이 담겨 있다. 약자인 주인공, 비정한 자본주의, 폭력과 개그 사이를 오가는 슬랩스틱, 휴머니즘을 지향하는 결말 등. 이것들은 채플린 영화를 이루는 토대다. 채플린은 이것들을 자기 영화에서 줄곧 써먹었다. <모던 타임즈>도 그렇고 <황금광 시대>도 그렇다. 히틀러를 비꼰 <위대한 독재자>는 다를까? <위대한 독재자>도 그러하다. 앞서 열거한 세계관은 모든 작품의 줄기를 이룬다.
단편이라 할 말은 적지만 생각하고 발견한 점을 기록해보겠다.

1. 서사 분석
처음에 이런 자막이 뜬다. 'Once again in the cruel, cruel world.' 잔인한 세상이 반복된다, 라는 뜻 같은데 잔인한 세상이란 이기주의와 물신주의가 팽배한 곳이다. 채플린은 영화에서 이기주의와 물신주의가 만연한 미국 사회를 조롱했다. 나는 이기주의와 물신주의를 비난할 생각 없다. 이기주의와 물신주의는 당연한 현상이다. 그것은 극복할 수도 없고 극복되어서도 안 된다. 이기심과 사적 소유가 없다면 인간은 행복과 자유를 잃을 것이다. 안타깝고 유감스럽지만 인간은 그런 동물이다. 자기 것을 확보해야 마음이 놓이는 동물이다. 사실 세상에 구원이란 없다. 이타적인 구세주도 없다.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일일 것이다. 아니면 생사를 타파하는 해탈이거나. 어느 쪽으로 봐도 착한 사람이 말하는 착한 세상은 아니다. 그런 것은 싸구려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상상의 산물이다. 채플린의 성찰은 철학자나 예술가 수준이 아니므로 휴머니즘에 다다른다. 그는 세상을 구원할 방법으로 휴머니즘을 주창한다. 맹자가 말한 성선설과 비슷하다. 인간은 본래 착하므로 선한 본성을 되찾을 때만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말이다. 채플린이 여성(에드나 펄비안스)을 도와준 까닭도 그러하다. 마지막에 그는 떠돌이답게 길을 떠나는데 그 장면은 희망을 담지하고 있다. 비록 경찰에 쫓겨 달아나지만 슬픈 결말(unhappy ending)은 아니다. 선행을 베풀고 떠나는 채플린은 예수를 환기한다. 즉, 그가 말하는 구원은 선행이다. 휴머니즘이다. 법을 수호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경찰이 있어도 사회는 평화롭지 않다. 그들은 그저 직장인일 따름이다. 영화는 경찰을 무능력하고 사악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근무 시간에 태만히 차를 마시고 범인도 제대로 잡지 못한다.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모습은 불량스럽기까지 하다. 담배를 피우며 거만하게 앉은 모습에 신뢰감이란 없다. 영화 제목이 '경찰'인데 진짜 경찰은 그들이 아니라 채플린이다. 그들은 여성의 집에 와서 아무것도 못 한다. 한 일이 없다. 여성을 도운 사람은 정작 도둑이었던 채플린이다. 여성을 도와줬으니 진짜 경찰은 그인 셈이다. 경찰에 대한 불신과 비판은 초반에도 등장한다. 채플린은 전도사에게 소매치기당하고 그를 쫓다가 도중에 경찰을 발견하고 그를 발로 찬다. 애먼 경찰을 왜 차느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이는 무능력한 경찰에 대한 채플린의 일격이다. 이상하게도 죄 없는 경찰이 맞았을 때 나는 웃음이 터졌다. 아무 상관 없는 경찰이 맞았는데 불쌍하기는커녕 통쾌했다.
요즘 승려 비행 탓에 종교계가 시끄럽다. 스님이 도박에다 성매매까지 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거의 말세다. 막장이나 다름없다. 승복을 벗고 환속해도 시원찮을 판이다. 사실 나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불교가 기독교만큼 비리가 심하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들어서 알고 있었다. 종교라고 마냥 깨끗한 것이 아니다. 더럽다면 정말 더러운 곳이 종교계다. 중생에게 희망을 팔아 돈을 버는 곳. 거기가 절이고 교회다. 우리는 있지도 않은 희망을 내면화하면서 돈을 내고 면제부를 산다. 기도를 하면서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명상을 하면서 부처가 되기를 바란다. 스님과 목사는 우리가 바친 돈으로 집과 차를 장만한다. 교단은 세력을 불려가며 권력을 제도화한다. 이쯤 되면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사업이다. 소비자에게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뿐이지 비지니스나 다름없다. 영화에서도 종교는 타락할 만큼 타락했다. 전도사가 등장하는데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으나 그는 설교하는 척하면서 돈을 슬쩍한다. 길거리 부랑자가 찬 좋은 시계도 훔쳐간다. 성경만 들었을 뿐이지 도둑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채플린은 양심이라도 지켰다. 채플린은 부랑자가 찬 시계를 탐하지만 훔치지는 않는다. 나중에 여성의 집에서 여성이 전도사와 똑같이 설교하는데 채플린은 돈을 도둑맞은 기억이 나 옷을 가다듬는다. 이는 경찰과 마찬가지로 채플린이 종교를 불신한다는 증거다. 이기주의와 물신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경찰과 종교는 한 통속이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사는 자 누구인가? 없다.
채플린이 과일 가게에 들렀을 때 주인은 깐깐하게 군다. 채플린이 과일을 집을 때마다 주인은 가격을 명시한다. 장사치야 돈 버는 일이 목적이겠지만 그는 과일 파는 일보다 돈 버는 일에 혈안이 돼 있다. 물론 돈 버는 일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치만 주인의 태도는 정도가 심하다. 그는 배를 내밀고 눈을 부릅뜬 채 손님(채플린)을 감시한다. 물품과 자본을 거래할 생각은 없고 돈만 벌면 그만이다는 식으로 보인다. 그는 이기주의와 물신주의에 감염된 현대인의 초상이다. 볼록 나온 배는 현대인의 탐욕을 상징한다. 몸은 말랐는데 배만 볼록하다.
공동 여관에서 채플린은 돈이 없다고 쫓겨난다. 아픈 시늉을 해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현대는 인간보다 자본이 우선하는 사회다. 돈이 없으면 아사하든 동사하든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잔인한 사회가 맞다. 그런데 이런 점은 자연도 마찬가지다. 본래 우주의 목적은 생존이다. 생존 앞에 인본주의란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백의를 입은 여성은 천사처럼 보인다. 그녀는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다. 현재 그녀는 두 도둑을 회유하고 있다. 이때 음악은 격한 음조에서 차분한 음조로 바뀐다. 분위기가 따스해진다. 채플린은 2층에 올라가지 말라는 여성의 부탁을 듣고 친구 녀석(도둑)을 못 올라가게 막는다. 이때부터 채플린의 양심이 발휘된다. 채플린은 물질(훔친 물건)보다 인간(인본주의)을 중시한다. 2층에 올라가면 어성의 엄마가 충격받아 죽을 수도 있으므로 어떻게 해서든 친구의 2층 진입을 막는다. 경찰이 도착하자 친구는 도망치고 채플린이 붙잡힌다. 영락없이 끌려가게 생겼는데 여성이 채플린을 남편이라고 말한다. 채플린이 선행을 베풀었으니 그녀도 선행으로 보답한 셈이다. 휴머니즘은 이렇게 상호 이득을 창출하고 영화를 행복한 결말로 이끈다.
세상을 구원할 것은 무엇? 경찰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바로 우리의 따뜻한 마음이다.

2. 영화의 어린 모습
영화는 본래 흑백이었으므로 낮과 밤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색이 없으므로 낮인지 밤인지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사용된 방법이 색깔 프린트다. 흑백 화면이 지루하지 않게 여러 색을 입힘으로써 고안된 방법인데, 이 영화에서는 낮과 밤을 구별하는 데 쓰였다. 밤의 실내는 주황으로, 밤의 야외는 청색으로 채색되었다. 낮은 물론 흑백이다.
숏의 구도와 크기는 정직하다. 숏의 구할(90%)은 정면-풀숏이다. 이는 영화가 연극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초기 영화는 연극의 연장이었다. 영화라는 개념이 따로 있던 것이 아니라 연극을 카메라로 촬영한다는 개념만 있었다. 중국에서도 초기 영화는 경극을 보존하는 기록 수단이었다. 그러니 숏의 분할이 존재했을 리 만무하다. 클로즈업은 서너 번께 쓰였고, 숏의 분할도 롱숏에서 미디엄숏으로 한 번 전환하는 데 그친다. 재밌는 점은 시네마토그래프의 잔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1895년 그랑카페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시연했을 때 개중 정원에서 물 뿌리는 아저씨에게 한 꼬마가 장난 치는 영상(?)이 있었다. 꼬마가 호스를 밟자 물이 안 나온다. 아저씨가 이상하게 여겨 호스를 들여다보는데 꼬마가 발을 떼어 얼굴에 물을 맞는다. 화난 아저씨가 꼬마를 쫓아가 붙잡고 혼을 낸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도망친 꼬마를 잡은 곳에서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앞으로 데려와서 혼을 낸다는 것이다. 숏 분할이라는, cut을 사용한다는, 데쿠파주 개념이 없었으므로, 카메라를 쓸 줄 몰랐으므로, 카메라를 연극 상황을 기록하는 도구로만 여겼으므로 아이를 카메라 앞으로 데려와 혼을 낸 것이다. 아이가 도망친 자리는 카메라에서 머니까 잘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를 도망친 자리로 이동해 찍으면 되는데 당시에는 그럴 생각을 못 했다. <경찰>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채플린이 친구를 만났을 때, 친구는 채플린 등뒤에 총을 겨누고 카메라 앞으로 끌고와 주머니를 뒤진다. 채플린이 길을 걷고 있었으므로 카메라에서 멀어진 상태였는데, 관객(카메라)에게 잘 보이려고 앞에까지 데려와 행동을 취한 것이다. 숏을 분할할 생각을 안 하고 배우 동선을 숏에 맞춘 셈이다. 즉, 카메라가 배우를 따른 것이 아니라 배우가 카메라를 따랐다. 이 말은 영화의 눈(카메라)을 활용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의 도구는 카메라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 도구를 쓸 줄 몰랐다. 카메라보다 중요한 것은 연극적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초기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 가까웠다.
<노스페라투>로 유명한 그림자 연출이 등장한다.

잡말: 당시 에드나 펄비안스는 마르고 예뻤다. 역시 살은 빼고 볼 일.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The Day A Pig Fell Into The Well)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는 아니다. 홍상수 애호가들은 이 영화를 극찬한다. 처녁작이라 그런지 대접도 극진하다. 나는, 홍상수식 카메라가 보이지 않아서 좋아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여기서 무분별한 클로즈업과 핸드헬드까지 선보였다. 그답지 않다. 홍상수식 카메라는 고정-롱숏-롱테이크가 진수 아닌가. 내가 <강원도의 힘>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렇다. <강원도의 힘>은 고정-롱숏-롱테이크의 진수를 보여준다. 카메라는 인간을 관찰만 하고 거기에 개입하지 않는다. 끝까지 관찰자로 남는다. 클로즈업도 몇 번밖에 쓰이지 않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인물이 전화하는 장면까지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카메라가 덜 각성했다고 볼 수 있다. 광각렌즈 또한 홍상수답지 않다. 왜곡된 화면은 일상보다 꿈에 가깝다. 나는 홍상수의 진정한 시작은 <강원도의 힘>이라 생각한다. '돼지'는 초기 실험작 정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훌륭하다. 나 같은 문외한이 무얼 알겠는가. 평론가 말에 따르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한국 영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축복이다. 기존 영화문법을 전복한 천재적 작품이다.

1. 정체성
홍상수를 설명할 때 일상을 들먹이며 브레송과 비교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헛소리다. 브레송 영화를 한 번이라고 봤다면 그런 소리 못 한다. 브레송과 홍상수는 양극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작품 세계를 논한다면, 브레송은 성스럽고 홍상수는 속스럽다. 성과 속을 구별한다면 그렇다. 브레송은 종교에 심취해 구원을 추구하지만 홍상수는 속세에 짓눌려 구원을 단념한다.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브레송의 인간은 무겁고 진지하다. 그 정도가 심해서 나중에는 감정이 탈색되기까지 한다. 후기작을 보라. 그들은 나무처럼 뻣뻣하고 시체처럼 무감각하다. 홍상수의 인간은 이와 다르다. 그들은 아이처럼 유치하고 동물처럼 충동적이다. 감정에 쉽게 휘둘리고 우발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브레송이 아니라 브뉘엘에 가깝다. 브뉘엘의 속물들은 홍상수의 조상이다. 영화 형식도 살펴보자. 브레송은 롱숏을 거의 쓰지 않는다. 후기작으로 갈수록 미디엄숏과 클로즈업만 보인다. 그는 설정숏도 쓰지 않는다. 시간과 장소는 관객이 알아서 유추해야 한다. 클로즈업은 인물을 절단해 즉자존재로 전락시킨다. 그의 영화에서 인물은 사물과 차이가 없다. 즉자존재인 인간은 허무한 세상의 부속품이다. 때문에 운명을 개척할 힘도 없고 힘이 없으니 구원도 없다. 인간은 악이 점령한 세상에 휩쓸려갈 뿐이다. 허무와 절망. 브레송은 그것만 말한다. 그의 인간들은 탈속해 천국을 갈망하지만 지옥에 추락한다. 그리고 영화는 자막 없이 막을 내린다. 여기에 음악도 없고 해설도 없다. 관객은 컴컴한 영화관에서 허무와 절망만 느끼고 자리를 뜬다. 홍상수는 염세적이되 절망적이지는 않다. 그는 <하하하>에서 세상을 밝게 보기로 결심했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두워도 긍정을 잃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의 인간들은 유치하고 비루하지만 그래도 살아간다. 브레송처럼 살해되거나 자살하는 경우는 없다. 고정-롱숏-롱테이크는 인간을 관찰하면서 키득거린다. 가끔은 줌으로 들어가지만 그것은 개입이 아니라 집중이다. 카메라는 인물에게 개입하지 않고 자유를 허락한다. 인물은 자유를 보장받고 리얼을 극화하면서 대자존재임을 증명한다. 브레송과 다르게 그들은 활동적이다. 인물과 배경, 인물과 사물의 경계는 뚜렷하다. 홍상수의 카메라 안에서 그들은 운명의 주인공이다. 여기에 탈색된 언행도 없고 탈색된 감정도 없다. 그들은 진짜 언어로 말하고 진짜 감정으로 행동한다. 설정숏 또한 진부하게 존재한다. 홍상수는 여기가 어디인지 늘 알려준다. 노골적으로 간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영화에 시간과 장소는 중요한 요소다. 브레송이 시공간을 배제해 일상의 허무를 부각했다면, 홍상수는 시공간을 부각해 일상의 허무를 배제했다. 둘은 서로 판이한 것이다. 카메라 움직임도 그렇다. 브레송의 카메라는 물 흐르듯 움직인다. 홍상수의 카메라는 패닝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 브레송의 카메라가 주관자라면 홍상수의 카메라는 관찰자다. 컷의 차이도 극명하다. 브레송은 아마 영화 역사상 최다 컷을 자랑할 테다. 그는 쪼개고 또 쪼갠다. 쪼갬으로써 인간과 세상을 분절해 의미를 탈락시킨다. 홍상수는 쪼개지 않는다. 중요한 물건이 아닌 이상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경우도 없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포용한다. 포용함으로써 현실성을 유지하고 그 안에 미장센을 끼워 넣는다. 이 말은 반대로 브레송에게 미장센이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브레송은 저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에서 미장센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영화가 기존 영화와 다르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 시네마토그래프다. 그의 인물은 배우가 아니라 모델이다. 컷과 클로즈업이 난무하는 영화에 미장센이 어디 있겠고 딱딱하고 무감각한 연기에 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그가 전문 연기자를 왜 쓰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반대로 홍상수는 <강원도의 힘>만 제외하고 전문 연기자를 썼다. 그의 페르소나는 김상경에서 시작해 김태우를 거쳐 유준상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홍상수 했을 때 브레송을 떠올리는 까닭은 인터뷰 때문인 듯하다. 한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감명 깊게 본 영화로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꼽았다. 드레이어의 <오데트>도 꼽았는데, 이런 탓에 오해가 생긴 모양이다. 홍상수는 브레송에게 감명 받았을 뿐 영화적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브레송과 홍상수는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 브레송이 공산주의라면 홍상수는 자본주의다. 위상이 그렇다는 소리다. 홍상수가 영화적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브뉘엘과 안토니오니다. 홍상수는 브뉘엘의 철학에 안토니오니의 형식을 덧씌워 자기 영화를 개발했다. 그는 안토니오니의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브뉘엘의 속물들을 빠뜨렸다. 어떻게 될지 내심 기대했던 모양이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속물들은 건조한 화면과 꼼꼼한 미장센 속에서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그들은 영화를 보는 우리와 같고, 카메라가 비추는 세상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다. 현실을 담지한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홍상수는 멈추지 않고 여기에 우연을 첨가해 카오스적 우주를 표현했다. 그는 도인이 되어가고 있다. 현실의 카오스와 영화의 코스모스가 충돌해 제3의 세계가 태어났는데, 그것이 홍상수 영화다.
그는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는가? 누구나 고민해봤을 테다. 확답할 수 없지만 유추는 가능하다. 이 영화에 근거가 될 만한 대사가 나온다. 효섭이 출판사를 찾아갔을 때 직원이 말한다. "저도 글을 하나 구상하고 있어요. 장자와 마르크스의 만남인데, 현대인들은 자연에서 유리되어서 살고 있죠? 더 나아가서 이데올로기의 해체로 인해서 인류의 꿈과 이상이 상실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홍상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왜 남자는 섹스에만 몰두하고, 왜 여자는 배신을 일삼고, 왜 인간관계는 지속되지 않고, 왜 희망과 구원은 없는지. 장자는 자연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의 노자와 엇비슷하고, 노자와 사상을 공유하는 철학자들은 속세의 초월과 해탈을 갈파한다. 그들의 목적은 동물적 본성에서 벗어나 신선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고답적 초인이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 유리되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현대인은 초월하지 못하고 속세에 머물러 있다. 비인간적인 문명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하지 못한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혁명가다. 그는 초월이 아니라 개혁을 갈파한다. 그는 속세를 떠나지 않고 속세에 머물러 속세를 전복해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말 그대로 꿈의 사상. 대한민국은 민주화는 이루었지만 제대로 된 정치 개혁에는 실패했다. 친일파와 기회주의는 이름만 바꿔 집권 세력을 고수하고 있다. 자유당 - 공화당 - 민정당 - 민자당 - 신한국당 - 한나라당 - 새누리당. 민주화 세력이 승리한 기간은 고작 10년이다. 지난 대선 때 속은 것도 모자라 이번 총선에서 우리는 또 속았다. 주가를 조작했든, 제수를 성희롱했든, 논문을 복사했든 상관없다. 경제만 살려준다면 누구라도 뽑겠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상식이다. 이데올로기가 해체되어 꿈과 이상을 상실했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초월도 없고 개혁도 없다. 그럼 무엇이 남겠는가? 속세에 사는 중생의 비열한 삶만 있을 뿐이다. 장자는 속세를 떠나 부처가 되기를 바랐고, 마르크스는 속세를 개혁해 전륜성왕이 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둘 다 실패했다. 때문에 홍상수 영화에는 종교 얘기와 정치 얘기가 없다. 나오지 않는다. 나올 수가 없다. 나오면 안 된다. 속물이 무슨 종교와 정치에 관심 있겠는가. 속물은 자기 욕망에만 관심 있다. <밤과 낮>에 기독교 얘기가 나오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겉도는 소재일 뿐이다. 주인공은 성경에 심취해 삶을 바꿔보려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는 속물 근성 앞에 무너진다. 결국 홍상수가 하고픈 말은 '속물-보기'다. 자연에서 유리되어 이데올로기 없이 속세를 떠도는 현대인을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실망하고, 키득대고, 반성한다. 홍상수 영화의 정체성은 그러하다.

2. 돼지의 일상
효섭은 삼류 소설가다. 그는 옥탑방에서 근근이 산다. 아침에 외출하면서 이웃집 열매를 따 먹는다. 영화는 그 열매를 보여주면서 시작되는데, 열매는 성경에서 말하는 선악과를 뜻한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낙원에서 추방됐다. 효섭이 열매를 먹었다는 것은 그가 악인이 되었다는 뜻이고 앞으로 펼쳐질 일상이 낙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선악과를 먹음과 동시에 세상은 비분법이 아니라 이분법의 세계가 되었다. 인간은 선악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받는다. 앞으로 전개될 얘기도 그럴 것이다. 선악과의 의미를 부각하려고 영화는 곳곳에 기독교와 관련된 사물을 배치했다. 맨 위에 보면 효섭의 집 너머로 교회가 보인다. 화분 옆에는 전시주 혹은 안테나가 보이는데 십자가 모양을 닮았다.
효섭은 출판사에 들러 후배와 애기를 나눈다. 원고 읽어봤냐는 질문에 후배는 바빠서 못 읽었다고 답한다. 효섭은 바쁜 후배의 직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삐친다. 현대인은 이렇게 속이 좁다. 후배는 모자를 쓰고 있다. 실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모자는 일종의 권력으로 감투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모자를 썼다는 것은, 감투를 썼다는 것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뜻이다. 효섭은 소설가고 후배는 출판사 직원이다. 후배는 효섭의 원고를 읽고 출판할지 말지 결정하기에 효섭보다 지배적 위치에 있다. 모자는 그런 지배적 위상을 나타내는 소품이다. 모자는 나중에 또 나오는데, 그때는 잘나가는 동기가 쓰고 있다. 효섭은 삼류 소설가이기에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잘나가는 동기의 우월감은 모자로 표현된다. 모자는 곧 벼슬이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원고에 뭐가 묻는다. 이는 복선이다. 효섭은 후에 고깃집에 가는데, 직원이 실수로 옷에 김치를 쏟는다. 원고에 뭐가 묻고 옷에 김치가 묻고. 두 설정은 상통한다.
효섭은 카페에서 민재를 만난다. 민재가 아침 먹었냐고 묻는다. 효섭은 안 먹었다고 고개를 젓는다. 방금 식당에서 밥을 먹었으면서 안 먹었다고 거짓말한 것이다. 그만큼 자기가 밥 굶을 정도로 노력하는 소설가라는 뜻이다. 결국 허세지만. 효섭은 민재가 원고를 읽는 동안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운다. 그는 화분 앞에 쭈그리고 앉아 벌레 한 마리를 괴롭힌다. 그 벌레는 민재를 뜻한다. 효섭은 벌레를 괴롭히듯이 민재를 이용해 먹고 있다.
민재가 원고 읽은 소감을 말한다. "특히 그 여자가 마지막 부분에서 죽는 거요. 거기선 그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그런 남자의 배신을 보고선 가만있을 여잔 없을 테니까요."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흘려들으면 낭패 본다. 민재 말에 따르면, 원고에서 마지막에 여자가 죽는다. 이는 보경의 죽음을 뜻한다. 영화 마지막에 보경이 신문을 바닥에 깔고 베란다로 나간다. 영화는 여기에 어떤 해설도 붙이지 않고 끝난다. 그러나 우리는 보경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민재의 말은 영화 결말에 대한 해석이자 복선이다.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여자'는 보경이 틀림없다. 다른 단서를 찾아보자면, 민재는 자기라면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남자의 배신이란 효섭의 양다리다. 효섭은 보경과 사귀면서 민재와 만나고 있다. 후에 민재는 이 사실을 알게 되고, 화나 효섭에게 따졌다가 뺨 맞고, 자기를 좋아하는 민수와 섹스한다. 반면에 보경은 효섭을 용서한다. 그녀는 효섭과 여행을 떠나려고 짐까지 싸서 집을 나오고, 만나지 못한 그에게 편지까지 남긴다. 보경은 효섭을 용서한 것이 맞다. 그럼 정리해보자. 민재가 원고를 읽고 한 말에서 자기는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했고, 배신을 보고 가만있을 여자는 없다 말했으니, 민재는 효섭의 배신을 용서하지 않은 것이 되고 복수 심리에서 민수와 잤으니, '가만있지 않는' 여자는 죽지 않는 것이 된다. 설명이 복잡한데 다시 말하면, 배신을 보고 가만있지 않는 여자는 죽지 않는다. 왜냐하면 원고에서 여자는 죽고 그 여자는 배신을 보고서 가만있었기 때문이다. 즉, 가만있는 여자는 죽는다. 배신을 용서한 여자는 죽는다. 민재는 배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여자라 자기 같았으면 가만있지 않았을 것이고 때문에 원고에서 여자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은 자살을 뜻한다. 보경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보경은 효섭의 배신을 용서한다. 그녀는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는 여자다. 그러니 민재의 소감에 따르면, 보경은 죽는다. 남자의 배신을 보고 가만있는 여자는, 배신을 용서한 여자는 원고에서 죽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에 보경이 신문을 깔고 베란다로 나간 까닭은 자살 때문이다. 보경은 자살한 것이다.
민재의 소감을 들은 효섭은 눈이 커진다. 남자의 배신에 가만있지 않겠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효섭은 거짓말을 둘러대고 자리를 뜬다. "어떡하지? 난 지금 가야 되는데. 모르는 출판사인데 자꾸 만나자 그래서." 출판사에 가는 것은 맞지만 모르는 출판사가 자꾸 만나자고 한 적은 없다. 남자는 허세 빼면 시체다.
효섭의 물주인 민재는 음료 값도 계산하고 효섭에게 2만 원을 꾸어준다.
효섭은 보경을 만나 모텔에 간다. 보경은 왜 당신이 돈을 냈느냐고 말한다. 방 값을 효섭이 계산한 모양이다. 효섭은 말한다. "나도 돈 있어, 가끔." 그 돈은 민재가 꾸어준 2만 원이다. 보경은 과일을 씻으며 말한다. "당신 어러셔부터 과일 좋아했어요?" 여기서 과일은 욕망을 뜻한다. 과일은 선악과도 되고 욕망도 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에 가깝다. 효섭은 욕망에 충실한 속물이다. 보경이 유부녀이기에 효섭은 마음이 괴롭다. 자기(?)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자는 생각에 누가 편할 수 있을까. 효섭은 남편이랑 섹스하냐고 보경에게 묻는다. 역시 남자는 욕망 덩어리다. 속물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르는데 자꾸 만나자고 하는 출판사에 온 효섭. 한 직원이 생수통을 까고 정수기에 꼽는다. 무의미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 벽에 보면 백두산 천지 사진이 걸려 있다. 현대인은 천지에 갈 수 없기에 사진으로 구경한다. 직접 경험을 간접 경험으로 대체한 것이다. 이는 자연에서 유리된 현대인을 의미한다. 천지는 실존하는 장소인데도 사진으로 복사되고 유통된다. 우리는 천지를 사진으로밖에 경험할 수 없다. 생수통과 정수기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자연 물이 아니다. 인공 물이다. 우리는 어느덧 물까지 사 먹는 나라가 되었다. 효섭의 원고 제목은 '건강한 물에 건강한 미인'이다. 물이 반복되면서 천지와 생수통과 정수기를 상기시킨다.
효섭의 원고지에는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 효섭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 원고지쯤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현대인의 소유욕과 관련된다. 현대인은 내 것을 좋아한다. 뭐든지 이름을 붙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효섭이 보경과 모텔에서 섹스할 때도 효섭은 말한다. "내 꺼라고 말해줘. 내 꺼지?" 보경은 말한다. "당신 꺼에요."
효섭은 자기가 대학 모임에 연락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후배가 효섭에게 사과하며 모임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는데, 이 부분이 백미다. 꼼꼼한 관객이라면 알아차렸을 테다. 모임을 연락한 후배가 아까 출판사에서 모자 썼던 후배라는 것을. 효섭이 후배에게 전화했을 때 후배는 전화를 받으며 말한다. "네. 도서 출판 청입니다." 되돌아가, 효섭이 출판사 들어가는 장면을 보자.
간판이 작아서 글자가 희미한데, '도서출판 청'이라고 쓰여 있다. 모자 썼던 후배는 전화 받은 후배가 맞다. 아까 출판사에서 효섭은 후배에게 인사동에서 술 마시자고 했다. 후배는 약속이 저녁에 있다며 다음에 마시자고 했다. 저녁에 있는 약속이란 무엇인가? 바로 대학 모임이다. 효섭이 연락받지 못한 그 모임이다.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웃긴 일이다. 효섭도 대학 선배이고 대학 모임에 참석할 사람인데, 후배는 깜빡 잊었는지 바로 앞에 있는 효섭에게 약속 있다고 말하면서 모임 소식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상식적으로, 효섭이 술 마시자고 말했을 때 후배는 대학 모임을 거론했어야 한다. 어차피 모임에 동참할 텐데 둘이 술 마실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근데 후배는 대학 모임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만큼 효섭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다. 하찮고 보잘것없으니까 후배가 사전에 모임 소식도 안 알려준 것이고 술 마시자고 했을 때도 약속 있다고 말한 것이다. 후배 자신도 효섭이 대학 선배라는 사실을 잊고 있던 것이다. 정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존재의 가벼움은 모임에서 계속된다. 후배에게 전화해서 모임 시간과 장소를 전해 들은 효섭. 고깃집에서 노래하는데 텔레비전이 화면 반을 차지하고 있다. 효섭은 주도권을 빼앗기고 가장자리로 밀렸다. 그가 하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털레비전의 흑색은 대중의 무관심을 뜻한다. 모임에 참석한 누구도 효섭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다. 흑색은 무서우리만큼 무감정하다. 노래 가사도 그의 존재성을 대변한다. 효섭은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른다. "내 사랑 그대 내 곁에 있어줘. 이 세상 하나뿐인 오직 그대만이.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가사에서 효섭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그가 안길 곳은 없다.
잘나가는 후배 문호가 도착하고 대중의 관심은 그에게 쏠린다. 효섭은 애초부터 무관심 대상이었다. 이 숏은 광각렌즈로 찍은 듯한데, 거리감이 왜곡되어 마주하는 자리도 멀어졌고 전경과 후경도 멀어졌다. 이는 효섭의 외로움을 배가하고 그를 더 고립시킨다. 효섭은 카메라 맨 앞에 앉았는데 맨 앞에 있는데도 눈에 띄지 않는다. 구도의 중심은 좌측과 후측으로 쏠려 있다. 활동이 벌어지는 쪽도 좌측과 후측이다. 오른쪽 구석에 놓인 효섭은 고기만 먹는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런 상황은 <극장전>에서도 나온다.
문호는 홍선(옆 여자)에게 효섭을 소개한다. "참! 처음 봤지? 김효식이라고." 효섭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존재다.
위는 효섭이 고깃집에 걸린 천지 사진을 보는 장면이고, 아래는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관광 그림을 보는 장면이다. 현대인은 자연에서 유리되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효섭은 천지에 가본 문호에게 천지에서 수영해봤느냐고 묻는다. 문호는 천지에 가봤지만 효섭은 가보지 못했다. 이 차이는 잘나가는 문호와 삼류 소설가 효섭의 위상을 나타낸다.
효섭은 옷에 김치를 쏟은 직원과 말다툼한다. 직원이 이런 말을 한다. "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이 말은 고깃집 직원의 열등감과 계급 서열을 환기하며 하찮은 효섭의 존재성도 대변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지만 고깃집 직원이 나름 열등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효섭도 마찬가지다. 그 말에 울컥해 옷을 벗으며 물어 내라고 항의한다.
소란을 일으킨 직후 선배와 대화하는 효섭. 카메라는 둘을 부감으로 잡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은 관객을 우월한 지위로 격상하고 대상을 열등한 지위로 격하한다. 이 숏을 보는 우리는 신이 되어 땅을 내려다보는 듯하고 카메라에 잡힌 대상은 피조물이 되어 감시받는 듯하다. 옷 때문에 말다툼하고 싸운 효섭이나 그를 위로한답시고 허세 부리는 선배나 우리 눈에는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붙어 앉은 두 사람은 불쌍해 보인다.
약식 재판에서 효섭은 괴변을 늟어놓는다. 그의 주장에는 논리가 없다. 글이 잘 팔리지 않는 소설가라고 해서 누구도 자기를 무시할 권한이 없다고 말하면서, 문학을 토론하는데 왜 고깃집 직원이 끼어드냐고 말한다. 주장과 근거에 앞뒤가 안 맞는다. 계급 폐지론을 주장해야 할 문인이 무의식적으로 계급을 옹호하고 있다. 효섭은 구류 5일을 받는다. 판사에게 항의하지만 밖으로 끌려 나가고, 화면은 민수가 한 공무원에게 판결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민수와 공무원의 대화를 들어보면 민수도 구류 5일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효섭과 민수, 둘의 형량은 동일하다. 효섭은 한 아저씨에게 벌금 2만 원을 빌려주는데, 이는 인간의 얄팍한 동정심이다. 효섭은 구류 5일이지만 아저씨는 벌금 2만 원이다. 효섭의 형량이 더 크다. 형량 큰 자가 형량 작은 자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다. 이를 선행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속물의 자기 위안일 뿐이다.
이제 동우의 일상으로 넘어가자. 동우는 결벽증이다. 그는 처음부터 결벽증 증세를 보인다. 전주로 가는 버스에서 앞자리의 머리 시트를 떼고 붙이려다가 앞사람에게 한 소리 듣는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토를 한다. 양말에 토가 묻어 화장실에서 처리하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얻어 탄다.
백화점 사장과 만남이 어긋나고 동우는 헛걸음을 반복한다. 한 번은 여직원이 빵 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가루를 흘리고 먹어 지저분하다. 이는 동우의 결벽증과 연관 있다. 이때에도 사장과 못 만나는데 여기서 기다리겠냐는 여직원의 질문에 동우는 다시 오겠다고 나가버린다. 아마 여직원이 흘린 가루를 보고 걸음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동우는 아는 동생 인창을 만나 시간을 때운다. 인창의 차에서 동우는 차 모형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나중에 인창이 요즘 차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는데, 동우가 차 모형 장난감을 가지고 논 까닭은 그가 차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 모형 장난감은 차를 소유하고픈 동우의 소망이다.
인창은 팩스 받을 일이 있어서 동우를 데려다주지 못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은 거짓말이다. 동우가 가고, 인창은 아내와 섹스한다. 인창이 말했던 팩스는 섹스였다. 팩스와 섹스. 발음이 비슷하지 않은가? 본인 성욕 때문에 남에게 호의를 베풀지 못하는 현실. 이것이 속물의 세상이다.
"바로 이 교실에서만도 인체에 유해한 석면이 1.74밀리그램이나 발견됐습니다." 동우가 모텔에서 텔레비전을 켰을 때 나온 말이다. 동우는 무의식적으로 텔레비전을 끈다. 그는 결벽증이므로 드러운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
밖을 구경하다 다방 여자를 보고, 모텔 복도에서 사랑 싸움 하는 남녀를 보고 동우는 성욕을 느낀다. 모텔 복도에서 싸우는 남녀는 효섭과 보경이 싸운 모습과 비슷하다. 동우는 창녀를 부른다. 창녀는 어두운 조명을 보고 불 왜 안 켜냐고 묻는다. 동우가 불을 켜지 않은 이유는 수치심 때문이다. 그는 창녀를 부른 일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것을 안다. 창녀는 이불을 왜 텔레비전에 올려 놨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결벽증 때문이다. 동우는 모텔에 처음 왔을 때 침대에 묻은 더러운 흔적을 보고 불쾌해했다.
동우는 창녀와 섹스하며 말한다. "사랑하고 싶어." 창녀도 말한다. "나도 사랑하고 싶어요." 현대인은 사랑을 갈구한다. 우리가 진짜 사랑하고 있을까?
민재와 민수의 일상을 보자. 민재가 극장에 출근했을 때 민수는 짐을 왜 밖에다 놓지 않았냐며 어느 여직원에게 잔소리한다. 이는 민재 들으라고 한 소리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목소리 크게 내본 것이다.
극장 사장(민수의 삼촌)이 계단에 떨어진 담배 꽁초를 주울 때 민수가 삼촌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한다. 영화에서, 민수가 사장한테 무슨 말을 전하는지 나오지 않지만 예측이 가능하다. 전 장면에서 민수는 민재가 사장 몰래 외출한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민재가 돌아왔을 때 사장이 민재 나갔다 온 사실을 아니 둘러댈 말 준비하라고 민재에게 알려준다. 실은 자기가 사장한테 밀고했으면서 민재에게 호감을 사려고 작전을 짠 것이다. 사실관계를 종합하면, 민수는 사장한테 민재가 외출한 사실을 밀고했고, 민재는 민수가 자기를 위해 사장에게 혼나지 않게 하려고 귀띔해준 것이라 믿는다. 따지고 보면 모두 민수의 자작극이다. 자기가 밀고해 놓고 자기가 귀띔해줬다.
민재는 전자 오락실 녹음으로 7만 원을 받았으면서 5만 원 받았다고 동료에게 거짓말한다. 돈 빌려 달라고 할까 봐 액수를 낮춘 것이다. 나도 이런 적이 있다. 이런 적 많다. 돈은 자랑하는 편보다 숨기는 편이 낫다. 200을 벌면 150 번다 해야 하고, 300을 벌면 200 번다 해야 한다.
민수가 불량 청소년을 훈계하는 장면. 훈계는 하나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카메라는 그들을 부감으로 잡아 그들의 하찮음을 부각한다. 앙각으로 찍었다면 다른 느낌이 들었을 테다.
민재는 효섭이 바람 피운 사실을 깨닫고 뺨까지 얻어맞은 뒤 분식집에서 만두를 먹는다. 스토커 민수가 따라 들어오고 그도 만두를 시킨다. 같은 음식을 시킴으로써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효섭은 너를 찼어도 나는 네 편이다, 라는 뜻이다.
민재와 민수는 서로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한다. 유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대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한다. 실상은 애증과 배신과 바람과 치정의 반복이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홍상수는 위선적인 우리에게 일침을 날린다. 효섭은 민재를 때리면서 말한다. "집에 가서 더러운 곰 인형인지 토끼 인형인지 그런 거 안고 자. 너 그거 안고 자는 거 그게 순수한 거 같니? 너 순수랑 유치랑 구별 못 해?" 우리가 하는 사랑은 순수일까, 유치일까? 민재는 순수했기에, 자기는 순수하다고 생각했기에 성인 만화에 목소리를 녹음하지 못했다. 민수는 민재를 벽에다 밀치며 말한다. "순수가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민수 또한 자기의 사랑을 순수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사랑은 유치 차원을 넘어 성욕 혹은 살의나 다름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민수는 민재와 섹스할 때 눈을 쳐다보지 못한다.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고개를 숙여버린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말처럼, 그는 민재를 성욕의 대상으로 생각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민재를 보지 못하므로 사랑하지 못한다. 그의 사랑은 애초부터 순수가 아니라 섹스였다.
마지막은 보경의 일상이다. 보경은 늘 소통 장애를 겪는다. 효섭과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했는데, 효섭은 나타나지 않는다. 보경은 메시지를 남긴다. 발화자는 존재하지만 수화자는 부재한다. 보경의 목소리는 기계로 녹음되어 화석처럼 굳는다. 민재의 오락실 녹음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환전되어 기계로 녹음돼 세상을 떠돈다. 우리는 매번 그 목소리를 듣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인간성은 기계화해 상실되고 돈으로 치환된다. 보경이 효섭을 만나지 못해 동우에게 전화했을 때, 동우는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끊는다. 이것도 소통 장애와 관련 있다. 이 영화가 1996년에 개봉됐는데 지금도 상황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2012년인 현재에도 소통 장애는 만연하다. 이것은 산업과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이다. 인간은 본래 외롭다.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이 유행해도 개인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독은 개인이 짊어질 몫이지 남과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혼자라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소매치기당해 지갑을 잃은 보경은 버스에서 자는 바람에 종점에 도착한다. 다행히 근처에서 친구가 약국을 운영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빌려준 돈이 있는데 갚으라고 말은 못 하고 친구를 방문함으로써 눈치를 준다. 친구가 약국을 운영하는 동안 보경은 2층 집에서 잠을 자고 꿈을 꾼다. 꿈에서 보경의 장례식이 열린다. 연락 없는 효섭이 죽지 않았을까 의심했는데 그게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꿈에서 민재도 나오고, 결벽증 탓에 귀를 씻는 동우도 나오고, 자기 가슴을 만지는 효섭도 나온다. 꿈에는 여러 욕망이 뒤섞여 있다. 나중에 보경은 장례식이 열리는 거실로 나오는데 동우는 그녀가 나오든 말든 케이크만 먹는다. 동우의 매마른 애정이 꿈에서 나타난 것이다.
보경은 친구에게 돈을 받고 약국을 나간다. 이 장면이 좀 묘한데, 둘은 작별 인사도 나누지 않는다. 보경은 돈만 받고 나가고 친구는 보경이 나간뒤 문을 닫고 인상을 쓴다.
가장 아리송한 마지막 장면을 보자. 보경은 소파에 앉아 있다. 날을 보니 아침인 듯하다. 거실에 보경 혼자 있다. 간밤에 담배 사러 나간 동우는 보이지 않는다. 시나리오에서는 동우가 담배 사러 나갔다 차 사고를 당해 죽는다고 한다. 아마 보경은 신문을 통해 동우의 죽음과 효섭을 죽음을 접했을 확률이 높다. 충격 먹은 보경은 자실을 결심한다. 신문을 바닥에 깐 행동은 일종의 유언이다. 자기가 왜 자살했는지 신문을 통해 밝힌 것이다.

3. 꼼꼼한 연출
극의 전개는 9월에서 12월까지 이어졌다. 홍상수는 달력을 화면에 세심하게 배치했다.
4번째 사진에서 달력에 26일에 동그라미가 쳐 있다. 10월 26일은 민재에게 중요한 날인 모양이다. 관객은 영화에서 오늘이 며칠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 속 그날이 26일인지 27일인지 28일인지 알 길이 없다. 홍상수는 대사를 통해 며칠인지 알려준다. 다음 장면에서 민재가 모닝콜 전화를 하는데 이렇게 말한다. "오늘은 10월 26일이고요. 7시 됐거든요. 일어나셨죠?" 넋 놓고 보면 이런 대사도 놓치기 십상이다.
일상에는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홍상수는 엑스트라 출연에도 세심함을 발휘했다. 보경이 소매치기당하는 시퀀스에서 군인 두 명이 등장한다. 그들이 어디에 어떻게 배치되었는지 살펴보자. 이것도 숨은그림 찾기처럼 재밌다.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My Girlfriend's Boyfriend)

프랑스에서는 홍상수를 로메르와 비교한다. 둘의 영화가 닮았기 때문이다. 극적 과장이 없다는 점, 카메라가 단순하다는 점, 리얼리즘을 고수한다는 점이 그렇다. 무엇보다 연애 얘기를 자주 한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겠다. 홍상수는 연애 얘기를 빌어 인간사를 조롱하지만 로메르는 연애 얘기에 충실하다. 그에게는 다른 의도가 없다. 오직 연애를 통해 인간사를 탐구할 뿐이다. 성욕과 지식권력을 비꼬는 것도 그의 관심 밖이다. 그는 인간은 왜 존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연애를 통해 성찰한다. 남녀의 만남과 결별이 그에게 화두다. 여기에 성욕과 본성은 무화되기까지 한다. 홍상수라면 여자를 모텔에 끌고 가겠지만 로메르는 그러하지 않는다. 남자는 의외로 신사답고 여자는 의외로 숙녀답다. 로메르 쪽 인물이 더 인간스럽고 홍상수 쪽 인물이 더 동물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로메르는 덜 유쾌하지만 더 진중하다. 홍상수가 "너희는 이래."라고 말한다면 로메르는 "우리는 이래야 해."라고 말한다. 이 차이는 엄청나다. 현실을 관찰하는 것과 해답을 성찰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그렇다고 로메르가 우월하다는 말은 아니다. 홍상수에게 아쉬운 점을 로메르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에 로메르에게 아쉬운 점을 홍상수가 가지고 있다. 로메르 영화는 여러 번 볼 만큼 유쾌하지 않다. 신랄한 비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로메르가 홍상수처럼 관찰하고, 홍상수가 로메르처럼 성찰했다면 둘은 거장 이상의 거장이 되었을 테다. 주관적 판단이고 개인적 바람이지만, 결국 내 말은 둘 모두 연애를 통해 족적을 남겼다는 뜻이다. 다만 차이는, 홍상수의 연애는 동물스럽고 로메르의 연애는 인간스럽다.
'희극과 격언' 마지막 작품이다. 제목이 강렬하다.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라니? 배신과 삼각관계가 떠오른다. 맞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는 얘기다. 레아와 블랑쉬라는 여자 둘이 나오는데 서로 사랑이 엇갈린다. 레아는 블랑쉬가 점찍은 남자와 사귀게 되고, 블랑쉬는 레아의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된다. 주인공이 블랑쉬이므로 영화 제목이 '내 여자 친구의 남자 친구'가 됐다. '내'는 블랑쉬고, '여자 친구'는 레아고, '남자 친구'는 레아의 애인 파비앙이다. 관계가 복잡하지만 남녀 두 짝이 엇갈려 사랑한다고 보면 된다. 소재는 동물스러우나, 홍상수스러우나 결말은 로메르답게 인간스럽다.
영화 처음에 격언이 뜬다. "내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다." 어떤 영화일지 예상되지 않는가?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면, 친구의 애인도 내 애인이다. 전 인류가 몇 다리 건너면 다 연결되듯 친구의 애인도 언젠가 내 애인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카피 문구를 기억하는가? 영화가 말하는 바도 이와 같다. 사랑은 유동적이라는 뜻이다. 내 것과 네 것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남녀의 만남과 이별은 운명이 아니라 우연에 지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연애는 그만큼 종잡을 수 없다. 우리는 매번 상대를 찾아 세상을 부유하고 표류한다. 어제의 후배가 오늘의 애인이 되고 오늘의 애인이 내일의 처제가 된다. 이런 경우는 좀 막장인가? 아무튼 우리의 연애는 숙명론에 지배받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우연이 반복되어 사건을 일으킨다. 다만 인간이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운명으로 생각하니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친구의 애인이니까 좋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 봤자 혼자 마음고생만 할 뿐. 로메르는 우연론을 내세워 우리에게 말한다. 갈등하지 마라.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하라.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이듯 친구의 애인도 내 애인이다. 연애란 이렇게 실체가 없는 것이다. 계통과 구분이 없는 것이다. 때가 되면 만나고 때가 되면 헤어지는 법. 우매한 중생이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도통한 로메르는 부처의 입장에서 연애론을 설파한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 너의 애인은 나의 애인이니 갈등하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사귀어라. 정말 위대한(?) 성찰이로다.

1. 인물 소개
초반에 두 여자가 만난다. 레아와 블랑쉬는 식당에서 합석하고 친구가 된다. 로메르는 그들의 대화와 사는 모습을 통해 인물 특성을 나타낸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블랑쉬는 혼자고 외롭다. 레아는 짝이 있고 외롭지 않다. 이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자.
블랑쉬가 식사하는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마스터숏인데 짧아서 아쉽다. 적어도 2초간은 보여줘야 관객이 알아채지. 위쪽에 파란 옷을 입은 여자가 블랑쉬다. 보이는가? 블랑쉬 혼자 혼자서 식사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 모두 누구와 함께 먹는데 블랑쉬는 혼자 먹는다. 구도 중심이 아래쪽에 있으므로 위에 위치한 블랑쉬는 상대적으로 미미해 보인다. 그녀는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다. 이 한 화면으로 그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레아가 합석을 요구한다. 그녀는 말한다. "빈 자리가 있는 거 알지만 혼자 있으면 남자들이 귀찮게 해요." 잘난 척이 역겹지만 사실이다. 레아는 인기가 많다. 블랑쉬와는 딴판이다. 블랑쉬는 혼자 먹어도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학이라도 하듯 이렇게 말한다. "여기 앉으면 안전할 거예요."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레아와 블랑쉬의 상황이 대조된다. 블랑쉬는 혼자고 레아는 여럿이다. 블랑쉬는 외롭고 레아는 외롭지 않다. 그녀는 오히려 관계를 귀찮아한다.
레아는 매일 다른 식당에서 먹는다고 말한다. 이는 레아의 바람기와 연관된다. 그녀는 매일 다른 식당을 찾는 것처럼 매번 다른 남자를 찾는다. 후에 레아는 파비앙 몰래 다른 남자와 여행한다.
주거 형태를 비교해보자. 블랑쉬는 고급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그녀의 집 주변은 황량하고 썰렁하다. 레아가 그녀 집에서 창밖을 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카메라는 레아의 시점으로 창밖을 두 번 담는다. 두 번 모두 썰렁한 풍경이다. 레아는 블랑쉬를 처음 만났을 때, 블랑쉬가 사는 곳이 막사 같다고 폄하한다. 겉은 으리하지만 속은 허허하다는 말이다. 블랑쉬는 막사가 아니라 궁전이라 말하고 이렇게 덧붙인다. "작은 집들이 많이 모인 곳보다 훨씬 독립적이에요." 이는 레아와 자기를 대조하며 본인 심정을 타나낸 말이다. '독립적'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실제로 외롭다. 레아가 블랑쉬의 집에서 본 썰렁한 창밖도 블랑쉬의 외로움을 대변한다. 레아는 주중에 파비앙 집에 살고 주말에 부모님 집에 산다. 그녀는 외롭지 않다. 블랑쉬처럼 혼자 살지 않고 짝도 있고 부모님도 있다. 반면에 블랑쉬는 고향이 시골이라 도시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직업 환경도 마찬가지다. 블랑쉬는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데, 상사도 없고 부하도 없고 비서도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혼자 일하고 근무 시간도 맘대로 조정할 수 있다. 자유롭지만 곁에 아무도 없으니 외로운 것이다. 그녀는 집에서도, 식당에서도, 직장에서도 혼자다. 그녀는 정말 외롭다. 설정이 이렇게 무자비할 줄이야.

2.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 된다
영화에서 모든 만남은 우연이다. 필연은 없다. 인간관계 또한 유동적이다. 서양인이라 그런지 우리처럼 낯가림이 심하지 않다. 그들은 아무하고나 쉽게 친해진다. 한 번 보고 인사하면 다 친구다. 레아와 블랑쉬가 식당에서 처음 만났을 때, 둘은 거리낌 없이 얘기하고 다음에 수명장 가자고 약속한다. 한 번 보고 단짝이 된 것이다. 알렉상드르와 만날 때도 그렇다. 수영장에서 만난 것도 우연이고 카페에서 만난 것도 우연이다. 레아와 블랑쉬는 길을 걷다가 카페에 앉아 있는 알렉상드르를 발견한다. 레아가 블랑쉬에게 여행 소식을 전할 때도 둘은 길에서 조우한다. 테니스장에 다녀온 후 아드리안느가 블랑쉬에게 사과할 때도 우연. 블랑쉬가 복도를 걷는데 난데없이 아드리안느가 튀어나온다. 휴대전화가 없는 세상이라 그런지 우연이 되풀이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어떠할까? 블랑쉬는 길에서 파비앙과 조우한다. 이 시퀀스에서 두 사람은 나중에 또 만난다. 파비앙은 말한다. "여긴 시골 동네 같아. 한 번은 같은 사람을 일곱 번이나 만났어." 이것뿐이겠는가. 블랑쉬는 가구점에서 램프를 보다가 길을 지나는 파비앙와 알렉상드르를 목격한다. 블랑쉬는 우연처럼 가장하고 그들 주변을 걷는다.
파티에서 블랑쉬는 알렉상드르에게 여기가 친구 집이냐고 묻는다. 알렉상드르는 친구의 친구 집이라고 답한다. 블랑쉬는 말한다. "우리 모두 손님이네요. 서로 모르는 사이고." 내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는 격언처럼, 그들의 인간관계는 구분과 한계가 없다. 시내와 강과 바다가 이어져 있듯 그들도 서로의 친구고 서로의 애인이다. 근친상간 같은 방목 형태.
알렉상드르에게 실망하고 블랑쉬는 집에 가겠다고 자리를 뜬다. 역에서 우연히 아드리안느를 만나고 그녀와 함께한다. 블랑쉬는 이번에도 아드리안느를 우연히 만난다. 이곳은 우연 천국.
마지막 집결 장소에서 우연은 종지부를 찍는다. 레아와 알렉상드르는 연인이 되고 약속 장소를 블랑쉬가 모를 만한 데로 잡는다. 약속 당일, 레아와 알렉상드르가 약속 장소에 왔는데 블랑쉬가 미리 와서 음료를 마시고 있다. 블랑쉬/파비앙 짝의 약속 장소와 레아/알렉상드르 짝의 약속 장소가 우연히 겹친 것이다. 극작에서 우연은 기피할 요소인데, 로메르는 우연을 적극 사용해서 주제에 걸맞는 세상을 창조했다. 연애에 필연과 운명이란 없다. 우리는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사귄다.

3. 색깔 연출법
홍상수와 로메르는 연출법이 유사하다. 그들은 형식적인 미장센을 피하면서 언행과 사물을 이용한다. 여기서는 주로 색이 쓰였다.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하하하>에서도 색 연출법이 등장한다. 한 가지 색을 반복하거나 두 가지 색을 대비하는데, 로메르는 이 영화에서 후자를 썼다. 첫 장면을 살펴보자.
블랑쉬가 일하는 시청 건물이다. 파랑과 녹색이 섞여 있다. 로메르가 영화를 위해 건물을 칠했을 리 없고 건물을 보고 영화에 색을 맞췄을 확률이 높다. 건물을 영화에 맞춘 것이 아니라 영화를 건물에 맞춘 것이다. 파랑과 녹색이 조화한 이 건물 장면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 성격을 규정한다. 이제부터 파랑과 녹색을 눈여겨보라는 뜻이다.
레아와 블랑쉬가 처음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공교롭게도 옷 색깔이 각각 파랑과 녹색이다. 이는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음을 뜻한다. 영화에서 파랑과 녹색은 친구나 연인을 뜻한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는 파랑과 녹색을 입는다. 둘은 수영장 약속을 잡고 다음에 만나기로 한다.
수영장에서 네 사람이 만난다. 왼쪽부터 블랑쉬, 알렉상드르, 레아, 아드리안느(쪼그리고 앉은)다. 레아와 블랑쉬는 친구이므로 파랑과 녹색을 입었다. 알렉상드르와 아드리안느는 연인이지만 깊은 사이가 아니므로 각각 파랑을 입었다. 후에 알렉상드르는 아드리안느를 차버리고 레아와 사귄다.
레아는 블랑쉬에게 자기 남자 친구 파비앙을 소개한다. 파비앙은 외투 안에 녹색을 입었다. 들고 있는 서류도 녹색이다. 여자 친구인 레아가 파랑을 입어줘서 연인임을 알려야 하는데 레아는 파랑을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음 본 블랑쉬가 파랑을 입을 수도 없는 상황. 파비앙은 녹색을 입었으므로 레아를 사랑하지만, 레아는 파랑을 입지 않았으므로 파비앙을 두고 갈등 중이다. 레아는 여기서 파비앙과 말다툼하고 나중에 블랑쉬를 만나 그를 험담한다. 파비앙이 녹색을 입었는데 레아가 파랑을 입지 않았다는 것은 레아가 파비앙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다는 뜻이다.
레아와 블랑쉬와 파비앙이 식사하고 있다. 친구인 레아와 블랑쉬는 파랑과 녹색을 입었다. 레아와 파비앙은 연인인데도 색을 맞추지 않았다. 파비앙 외투 안의 옷은 빨강이다. 둘은 결별할 운명이다.
레아와 블랑쉬가 길을 걷다 카페에 있는 알렉상드르를 발견한다. 레아는 블랑쉬가 알렉상드르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다. 카메라는 세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만 쓰리숏으로 잡고 이후부터 숏을 분할한다. 분할된 숏은 블랑쉬와 알렉상드르가 짝이 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옷 색도 살펴보자. 알렉상드르는 파란 정장에 파란 넥타이를 매었다. 블랑쉬는 파란 외투에 파란 윗옷을 받쳐 입었다. 만약 두 사람이 짝이 될 운명이었다면 한쪽이 녹색을 입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블랑쉬는 치마까지 파랑이다. 옆에 있는 레아를 보자. 레아는 후에 알렉상드르와 짝이 된다. 그녀의 옷에는 녹색이 깃들어 있다.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테니스장에서, 두 남자가 두 여자 사이에 앉았다. 두 남자는 서로 얘기한다. 두 남자, 파비앙과 알렉상드르는 연인처럼 파랑과 녹색으로 맞춰 입었다. 여기서 둘은 한편이다. 동떨어진 여자 둘은 파랑도 아니고 녹색도 아니다. 아드리안느(오른)는 알렉상드르와 짝이지만 파랑을 입지 않았고, 블랑쉬(왼)는 알렉상드르를 좋아하지만 생뚱맞은 색을 입고 왔다. 테니스 관람이 끝나고 알렉상드르는 다른 일행과 섞이고, 블랑쉬는 남은 둘과 어울리지 않고 집으로 향한다.
아드리안느는 블랑쉬가 알렉상드르를 좋아하는 것을 알지만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아드리안느는 블랑쉬에게 파비앙과 사귀라고 말한다. 이 장면에서 아드리안느는 블랑쉬에게 파비앙한테 당신을 칭찬했다고 말한다. 안드리안느는 블랑쉬에게 호감을 느끼고 파비앙과 잘되게 밀어준다. 그녀가 입은 색깔을 보라. 파란 가방을 매고 파란 치마를 입었다. 앞서 말했듯이 영화에서 파랑과 녹색은 서로 통한다. 아드리안느가 블랑쉬를 좋아하기에 파랑을 입은 것이다. 반면에 블랑쉬는 아드리안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가 알렉상드르와 사귀고 있기 때문이다. 블랑쉬는 녹색을 입지 않음으로써 아드리안느와 통하기를 거부했다.
훗날 연인이 될 블랑쉬와 파비앙. 이제는 어느 정도 친해졌다. 파비앙은 파랑으로 맞춤했고 블랑쉬는 녹색 가방을 매었다.
블랑쉬가 우연을 가장해서 알렉상드르와 만났다. 알렉상드르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자 블랑쉬가 거절한다. 속마음은 그게 아니면서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아예 안 될 운명이다. 만날 때마다 파랑으로 옷이 겹친다. 한쪽이 녹색을 입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작정하고 파랑을 입은 파비앙. 그는 여자 친구 레아가 다른 남자와 여행 떠난 사실을 안다. 그의 마음은 레아에서 블랑쉬로 기울었다. 블랑쉬는 알렉상드르를 좋아하기에 녹색이 아니라 빨강을 입었다. 파랑을 입은 파비앙은 여기서 블랑쉬에 대한 호감을 내비친다. 자기 이상형에 레아보다 블랑쉬가 가깝다나 뭐라나.
레아가 여행하는 사이 블랑쉬와 파비앙은 친구로서 데이트를 즐긴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존재할까? 블랑쉬는 파비앙과 함께하면서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가 좋아지고 있다. 블랑쉬가 입은 녹색 수영복이 그것을 알린다. 둘은 아직 연인이 아니기에 파비앙은 파랑이 아닌 잡색 팬티를 입었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두 친구. 블랑쉬는 파비앙에게 너와 함께 있으면 좋다면서 너와 함께 있는 만큼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도 좋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무슨 뜻이냐? 한마디로 너 좋다는 뜻이다. 파비앙은 레아에게 맘이 떠났기에 파랑을 입었다. 그는 블랑쉬를 좋아한다.
데이트 후 하룻밤을 보낸 두 친구. 블랑쉬는 친구의 남자 친구와 잤고, 파비앙은 여자 친구의 친구와 잤다. 섹스까지 했으니 사귈 줄 알았는데 블랑쉬가 맘을 바꾼다. 그녀는 파비앙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자고 말한다. 파비앙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에 동의한다. 둘의 반목은 색에서 드러난다. 연인이 아닌 친구로 남았기에 둘은 각각 파랑을 입었다.
연회에서 레아는 흰색과 파랑을 입고 블랑쉬도 흰색과 파랑을 입는다. 다만 위치가 서로 반대일 뿐이다. 이는 한 남자를 두고 경험을 공유한 두 여자의 입장을 뜻한다. 레아는 파비앙의 여자 친구고, 블랑쉬는 파비앙의 친구지만 하룻밤 잤다. 블랑쉬는 두 번째 여자 친구, 즉 정부, 즉 세컨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레아와 옷 색깔은 같지만 아래위 위치는 다르다.
그래도 블랑쉬는 알렉상드르를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는 전신 파랑으로 자기 맘을 표현하고 있다. 알렉상드르가 녹색을 입으면 되는데 그에게 녹색은 없다. 레아가 마시는 음료가 녹색이지만 그것은 무의미하고 양도 미미하다. 레아와 알렉상드르는 블랑쉬를 놔두고 둘이서만 대화한다. 블랑쉬는 환멸을 느끼고 자리를 뜬다. 알렉상드르가 바래다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그녀의 맘은 산산조각이 났다. 레아와 알렉상드르, 둘이만 남은 자리에서 알렉상드르는 레아를 지분거린다. 레아는 파비앙과 헤어졌기에 알렉상드르의 맘을 떠보며 간을 본다.
블랑쉬는 역에서 아드리안느를 만난다. 이런 우연이! 알렉상드르는 아드리안느를 내팽개치고 레아에게 접근하는데, 아드리안느는 그것을 알았는지 블랑쉬에게 공감이라도 하듯 파랑에 맞춰 녹색을 입었다. 블랑쉬는 알렉상드르에게 버림 받았고 아드리안느도 알렉상드르에게 버림 받았다. 알렉상드르는 두 여자 말고 레아를 좋아한다. 남은 두 여자는 서로 친구가 된다. 그들의 처지는 상통한다. 버림 받은 운명. 둘은 미술관에 가고 식사도 함께한다. 아드리안느는 그 자리에서 알렉상드르를 험담한다.
복잡한 남녀관계는 끝났다. 이제 정리됐다. 레아는 알렉상드르와 사귀고 블랑쉬는 파비앙과 사귄다. 약속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두 짝. 연인끼리 각각 파랑과 녹색을 입었다. 조화롭지 않은가? 레아의 남자 친구 알렉상드르는 블랑쉬가 점찍은 남자였고, 블랑쉬의 남자 친구 파비앙은 레아가 사귀었던 남자였다. 알렉상드르의 여자 친구 레아는 파비앙이 사귀었고, 파비앙의 여자 친구 블랑쉬는 알렉상드르를 좋아했다.

4. Frame In/Out
절묘한 프레임 인/아웃이 두 번 등장한다. 레아가 블랑쉬에게 파비앙을 소개할 때와 테니스장에서 네 남녀가 헤어질 때다. 우선 전자를 살펴보자. 카메라는 투숏으로 레아와 블랑쉬를 잡는다. 둘은 파비앙에게 걸어간다. 파비앙의 원숏이 이어지고 레아와 블랑쉬가 프레임인 한다. 파비앙과 블랑쉬가 처음 만나 인사한다. 레아와 블랑쉬는 약속이 있다며 프레임아웃 한다. 화면에는 파비앙 혼자 남는다. 파비앙이 둘이 어디 가느냐고 묻자 프레임아웃 한 레아와 블랑쉬의 투숏이 이어진다. 파비앙이 블랑쉬 말고 자기와 함께 가자고 레아를 설득한다. 이때 파비앙은 원숏이다. 레아는 블랑쉬와 함께한 화면을 프레임아웃 하고 파비앙 쪽으로 프레임인 한다. 그녀는 블랑쉬와 놀지 파비앙과 놀지 갈등한다. 화면은 블랑쉬 원숏과 레아/파비앙 투숏으로 분할된다. 눈치 빠른 블랑쉬가 연인끼리 놀 수 있도록 자기가 양보한다. 그때 블랑쉬는 레아/파비앙 투숏으로 프레임인 하고 프레임아웃 한다. 친구를 보내 섭섭한 레아는 파비앙에게서 프레임아웃 하고 원숏이 된다. 파비앙은 레아를 달래려고 레아 쪽으로 프레임인 한다. 두 사람은 투숏이 된다.
테니스장 시퀀스도 살펴보자. 화면을 보는 편이 설명하기 쉽겠다.
파랑과 녹색을 입은 파비앙과 알렉상드르. 그 앞에 두 여자 블랑쉬와 아드리안느가 보인다. 그들은 현재 한 화면에 공존한다. 가운데 나무가 화면을 분할하고 있는데 이것을 주시해야 한다.
카메라가 왼쪽으로 패닝하면서, 파비앙과 알렉상드르는 새 일행을 만나고 블랑쉬와 아드리안느는 전 화면에 보였던 나무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한 화면에 공존했던 그들은 두 패로 나뉜다. 파비앙과 알렉상드르 그리고 블랑쉬와 아드리안느.
블랑쉬와 아드리안느는 투숏으로 분할된다. 여자는 사랑과 관심을 원하는데 남자(알렉상드르)는 운동 얘기에만 빠져 있다.
알렉상드르는 새 일행과 운동하러 떠나고 파비앙이 여자들에 합류한다. 그는 블랑쉬/아드리안느 투숏에 프레임인 한다. 파비앙이 테니스 구경 더 할 것이냐고 묻자 아드리안느가 거절한다. 그녀는 알렉상드르가 떠났으므로 의기소침해졌다.
카메라가 줌인 하고 화면은 투숏이 된다. 안드리안느가 술 마시자고 권하지만 블랑쉬는 거절한다. 블랑쉬도 알렉상드르가 떠났기에 의기소침해졌다. 전 화면에서는 파비앙이 권하고 아드리안느가 거절했는데, 이 화면에서는 아드리안느가 권하고 블랑쉬가 거절한다.
블랑쉬가 집에 간다며 프레임아웃 하고 카메라는 움직여 파비앙과 아드리안느를 투숏으로 잡는다. 네 일행 중 남은 사람은 둘이다. 인물의 동선과 숏의 배치는 사건에 따라 변화했다. 프레임 인/아웃도 적절히 쓰였다. 떠남은 숏 분할과 프레임 인으로 표현됐고, 만남은 숏 합체와 프레임 아웃으로 표현됐다.

고환(Going Places)

제목에 끌려서 봤는데 영화가 제목만큼 충격적이다. 감독은 베르트랑 블리에. 나는 그의 영화를 처음 봤다.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라는 영화는 제목만 알고 있었다. 그는 독특한 코미디 감독으로 유명한 듯하다. 나는 <고환>을 보고 결론 내렸다. 블리에, 그는 미친 것이 틀림없다. 미쳐도 잘 미쳤다. 나쁘게 미친 게 아니라 착하게 미쳤다. 영화는 외설적이고 비윤리적이지만, 블리에가 잘 미친 덕분에 유쾌하고 명랑하다. 처음에는 두 미친놈(주인공)의 범법에 짜증이 났다. 불쾌했다. 원칙과 정의를 사랑하는 나로서는, 아무리 코미디라고 하지만 그들의 행위가 거슬렸다. 초장부터 여편네를 희롱하고 남의 차를 탈취하지 하는데 누가 좋아할까? 코미디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다. 나는 영화가 그 선을 넘어서 심란했다. 이들의 행위는 막이 내릴 때까지 관객을 설복하지 못할 듯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이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 클로드와 피에르, 두 미친놈의 행각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설복당해 그들을 납득하기 시작했다. 이는 영화가 기존 장르와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세상은 현실과 판이하다. 그들이 노는 세상은 비상식 천지다. 우리의 눈으로 그들을 판단하면 안 된다. 블리에는 두 광인을 영화에 심어 놓아 자유를 만끽하게 내버려 두었다. 클로드와 피에르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같다. 대적할 자 없고 누가 대적하면 없애 버린다. 실제 죽인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그들 앞에 거칠 게 없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물질성과 속물성을 헤집으며 섹스를 통한 자유를 갈망한다. 그들과 흘레 붙는 여성도 정상은 아니다. 마리는 예쁘장하지만 성性 개념이 없고 잔느 모로가 연기한 부인은 난데없는 자살로 속을 알 수 없게 만든다. 모든 것이 비상식적이고 아이러니하다. 그게 영화 속 세상이다. 그래서 상식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내가 처음에 불쾌감을 느낀 이유도 그러하다. 이 영화는 상식을 거부한다. 비상식을 통해 초월로 나아가는 영화다.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보통 코미디라 하기에는 도발적이고, 섹스 코미디라 하기에는 계급적이고, 블랙 코미디라 하기에는 명랑하다. 기존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그게 베르트랑 블리에의 세계인 듯하다. 앞으로 그의 영화를 챙겨 볼 생각이다. 제목만큼 충격적인 이 영화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로드무비란 주인공이 여정을 통해 성찰하고 깨닫는 영화다. <고환>도 로드무비에 속한다. 클로드와 피에르는 차를 탈취해가며 여정을 즐긴다.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피에르는 말한다. "난 여자가 필요해. 날 사랑하는 섹시한 여자 말이야." 그들은 섹스를 통해 인생을 성찰하고 자유를 희구한다. 놀랄 필요 없다. 나나 당신이나 얘들과 마찬가지다. 우리도 오르가슴을 위해 짝을 찾아다니며 평생을 허송하지 않은가. 이들은 단지 솔직할 뿐이다. 우리는 깨끗한 척 감출 뿐이고. 클로드와 피에르는 이런 우리와 이런 우리가 사는 세상에 경종을 울리며 진짜 자유로운 삶의 전형을 선보인다. 그들은 비상식을 통해 자유를 획득한다. 비상식이야말로 허위와 격식을 돌파할 수 있는 도구다. 상식으로는 자본주의의 물질성과 속물성을 타파할 수 없다. 이는 영화가 코미디가 되는 근거이기도 하다. 비상식은 통념을 깨뜨리며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요약해보자. <고환>은 두 남자가 섹스를 위해 여행하는 영화다. 한마디로 그들의 여정은 섹스 여행이다. 그들은 영화 내내 방랑하며 여자를 찾는다. 도중에 돈을 갈취하고 차를 탈취하는 것은 섹스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목적은 섹스다. 블리에가 밀하는 바도 그렇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섹스의 중요성을 알린다. 섹스야말로 인류를 해방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섹스를 통해 교감하고 인정받는다. 섹스를 해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생의 목적은 섹스다. 그런데 섹스를 방해하는 게 세상에는 너무 많다. 자본주의는 특히 그러하다. 성은 거의 권력이다. 있는 자만이 여성을 얻고 섹스를 즐긴다. 클로드와 피에르 같은 부랑자는 섹스를 음미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유를 획득할 방법이 없다. 블리에는 그들을 위해 판타지를 만들어주었다. 그게 이 영화다. 허구를 통한 자유 창조. 클로드와 피에르는 범법을 행하며 세상의 근간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도 괜찮다. 코미디라는 장르는 그들의 범법을 완충한다. 그리고 일탈이라는 자유를 창출한다. 때문에 관객은 웃으면서 행복해진다. 마냥 섹스해도 불쾌하지 않은 이유다.
글로 설명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간략화했다. 이해 바란다.
①클로드와 피에르는 부르주아만 약탈한다(전부는 아니지만 거의 그렇다). 처음에 희롱하는 여성도 부르주아고, 차를 도난당한 미용실 사장도 부르주아다. 그는 총(권력)도 가졌고 여자(마리)도 가졌다.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다. 피에르가 고환을 다쳐 간 곳도 가정집 병원이다. 의사 가족은 꽤 사는 편에 속한다. 볼링장에서 여성 둘이 말을 걸 때 클로드는 말한다. "우리도 너희 같은 개고기에 질리고 있다고." 이는 부르주아에 대한 혐오다. 부르주아와 단절된 모습은 호텔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이 접수처에 당도했을 때 직원들은 전화만 받고 있다. 그들을 무시하는 분위기다. 피에르가 투숙 정보를 작성할 때 접수원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것도 이와 연관된다. 피에르는 클로드와 잔느 모로한테만 물어본다. 자크가 자살한 후 떠돌 때 그들은 차를 네 번 갈아탄다. 개중 세 번은 부르주아의 차를 훔친 경우다. 첫 번째, 나무에 오줌 누는 운전수의 차는 비싸 보인다. 두 번째, 차 뒤에 배를 매다는 가족은 중산층처럼 보인다. 세 번째, 식당에서 나오는 부인은 영락없이 부르주아다. 레지스탕스 같은 차를 탔을 때, 그들은 한가롭게 식사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연기를 내뿜는다. 이것도 부르주아에 대한 혐오라고 볼 수 있다.
②클로드/피에르와 통하는 사람들은 어디인지 이상하다. 끼리끼리 논다고 그들은 서로 비슷하다. 마리는 미용실에서 일하는 샴푸걸이다. 샴푸걸이니 돈도 얼마 벌지 못할 테다. 그녀도 클로드와 피에르처럼 가난하다. 물론 집은 있지만. 부르주아가 아닌 점은 확실하다. 잔느 모로는 감옥에서 막 출소했다. 갈 데도 없고 쓸 돈도 없다. 목적지가 없다는 점에서 클로드/피에르와 유사하다. 잔느 모로의 아들 자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엄마처럼 난데없이 자살한다. 클로드/페에르보다 더한 엉뚱함이다. 자크린은 말한다. "난 얼마 전 학교에서 퇴학 맞았고 인생은 놀라워요." 그녀도 클로드/피에르처럼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유사하다. 비상식으로 서로 상통한다.
③마리는 불감증이었다. 그녀는 미용실 사장의 정부였는데, 그와 사귈 때는 섹스의 즐거움을 몰랐다. 쾌락을 느낄 줄 몰랐다. 그녀는 자크와 섹스할 때 처음으로 느낀다. 쾌락을 경험한다. 불감증에서 탈출한다. 그녀가 느낀 까닭은 상대와 교감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르가슴을 느끼고 클로드와 피에르에게 달려가 어떻게 느꼈는지 설명한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녀는 자크와 대화를 나누고 우는 자크를 껴안아주고 서로 애무했다.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주제는 이러하다. 사랑 없는 섹스는 무의미하다. 진정한 쾌락은 교감에서 나온다. 마리는 클로드/피에르와 할 때 못 느꼈다. 클로드와 피에르가 교감 없이 흔들기만 했기 때문이다. 클로드는 마리를 차가운 물고기에 비유하며 놀리지만 정작 차가운 물고기는 자신이었다. 어쨌든 섹스에는 교감이 필요하다.
이것은 마리가 처음 느꼈을 때 나온 장면이다. 클로드와 피에르가 신음을 쫓아 다가가고 있다. 특기할 점은 밑에 쏟아지는 물이다. 물이 댐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이는 마리의 쾌감이 터졌다는 뜻이다. 물은 애액을 상징하고, 그것이 댐을 비집고 분출됐다는 것은 마리가 불감증을 탈출했다는 뜻이다.
④마리는 자유인을 상징한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열차에서 만난 애기 엄마는 브래지어를 하고 있다. 수유가 끝났을 때 그녀는 어김없이 브래지어를 착용한다. 브래지어는 클로드와 피에르를 방어하는 장치다. 쾌락을 멀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녀가 클로드와 피에르를 받아들일 때 브래지어는 가슴에 없다. 가슴은 브래지어 없이 본모습으로 노출된다. 브래지어를 벗었다는 것은 그녀가 쾌락을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쾌락은 곧 자유고.
⑤잔느 모로는 권총을 음부에 넣고 격발해 자살한다. 클로드와 피에르가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의 음부는 권총을 물고 피를 토한 상태였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그녀는 식당 주인에게 생리의 소중함을 역설했다. 생리가 불편하지만 생리할 때가 행복한 것이라고. 생식 능력이 기쁨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그녀는 이미 폐경이다. 그녀는 생리를 통해 생식 능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권총은 남자의 성기가 되고 음부에 흘린 피는 생리혈이 된다. 그녀는 평생 생리하며 섹스하고 싶었던 것이다.
⑥클로드와 피에르는 자크를 경치 좋은 곳으로 데려간다. 그곳은 사방이 초목으로 둘러싸여 있다. 소유 형태는 공동소유다. 모든 재화는 공유된다. 심지어 여자(마리)까지. 이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를 환기하면서 유토피아를 상징한다. 초목과 공동소유를 통해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잠시 맛본다.
⑦클로드와 피에르는 빈집에 머문다. 그곳은 자크린의 집이고 그 동네는 한적하다. 사람도 없고 주변이 사막이라 썰렁하다. 클로드와 피에르는 단 둘이 그곳에 머무는데, 이는 여자 없는 세상에 남자 둘이 남은 상황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성애를 동성애로 대체한다. 클로드가 피에르를 강간하는 수준이지만. 그만큼 인간에게 섹스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여자가 없다면 남자들은 동성애라도 할 것이다.
⑧피에르가 고환을 다쳐 병원을 찾아갈 때 그들은 난관에 직면한다. 고환에 총을 맞으면 어디로 가야 할까? 클로드는 병원 안내판을 보고 망설인다. "내분비학이 무슨 뜻이지?" "그럼 안이비인후학은?" 나도 이런 문제를 경험한 적이 있다. 의료는 지식권력이 되어 일반인을 소외한다. 환자들은 보살핌이 아니라 소외를 당한다. 지식을 통해 의사의 권위는 높아지고 환자의 몸은 하찮아진다.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일반인과 동떨어진 의료의 지식권력을 조롱했다.

옥희의 영화(Oki's Movie)

유일하게 극장에서 본 홍상수 영화. 나는 극장에 가지 않는 편이고 홍상수 영화는 대개 집에서 봤다. 홍상수 영화 중 극장에서 본 것은 <옥희의 영화>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제 맛이라고. 나는 다르다. 나한테는 집에서 봐야 제 맛이다. 컴컴한 곳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보면 집중이 안 된다. 야한 장면이 나오면 침이 고이고 침을 삼키면 소리가 들릴까 봐 신경이 쓰인다. 극장 좌석도 불편하다. 허리를 펴면 등받이에 닿지 않고 허리를 등받이에 대면 자세가 구부정해진다. 내가 허리가 긴 편이라 허리를 계속 펴고 있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뒷좌석에 앉는다. 맨 뒤에 있어야 맘이 편하다. 신경 쓸 사람도 적어지고. 내게 영화는 유흥이 아니라 공부이므로 집에서 혼자 봐야 한다. 혼자 봐야 맘이 편하고 집중도 잘된다. 무엇보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으면 여러 번 볼 수 있다. 여러 번 보는 일이 내게 중요하다. 영화를 한 번 볼 때와 두 번 볼 때는 천지 차이다. 세 번 보면 신세계를 경험한다. 세 번을 넘어가면 그 영화에 득도得道한다. 물론 내 의견에는 핑계가 있다. 혼자 보고파서 극장에 안 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없어서 극장에 안 가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 돈을 아끼려고 극장에 안 간다. 극장료가 8천 원인데, 8천 원이면 책 한 권 혹은 명작 DVD 하나를 살 수 있다. 8천 원은 실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8천 원 내고 신작 볼래, 오즈 DVD 소장할래? 나라면 후자를 택한다. 극장 가는 돈은 정말 아깝다. 위페르와 찍은 홍상수의 신작이 올해 개봉할 듯한데, 그것도 집에서 볼 테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걸레가 되도록 돌려 봐야지. 욕하지 마시라. 나는 굿 다운로더다.
<옥희의 영화>는 CGV에서 봤다. 2년 전인데 기억이 난다. 상영관이 아담해서 좋았다. 사람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진구(이선균)가 찌질한 짓 할 때마다 웃었다. 나도 그랬다. 그때, 극장에서 처음 봤을 때,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언가 반복되는데 그 반복에서 구조를 찾아낼 수 없었다. 묘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해석하리라 결심하고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지금까지 봤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나는 홍상수 영화를 늘 이렇게 본다. 한 번에 몰아 보지 않고 틈틈이 본다. 주로 잠들기 전에 본다. 이 다음에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볼 생각이다. 일전에 포스팅해서 글을 올렸는데 삭제해서 사라졌다. 이번에는 제대로 분석해서 올리겠다.
나는 홍상수를 사랑한다. 그를 향한 애정이 남다르다.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열 손가락 안에 든다. 아니,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우리나라에 이런 감독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홍상수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강원도의 힘>과 <생활의 발견>이다. <극장전>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를 나눈다면 전기는 다 좋다. 줌이 등장하고 분위기가 재밌어질 때부터 나는 실망했다. 그가 롱테이크와 염세주의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1. 시공간 맞추기
인터뷰에서 홍상수는 말했다. 전작들은 퍼즐처럼 맞춰지지만 <옥희의 영화>는 맞춰지지 않는다고. 즉흥적으로 만든 영화라 구조가 없다는 소리다. 구조가 없으니 조각이 서로 맞지 않는다. 따로 노는 셈인데, 나는 그가 농담 겸 진담을 했다고 생각한다. 즉흥적으로 만든 것은 맞다. 구조가 없다는 말도 맞다. 즉흥에 기반했으니 구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각은 맞춰진다. 퍼즐처럼 맞춰진다. 맞춰지니 구조가 있는 셈이다. 없다고 했는데 왜 있을까? 홍상수가 거짓말을 했거나 내가 확대해석을 했거나. 경우는 둘 중 하나다. 내가 확대해석을 했다고 믿는 편이 낫겠다. 지금부터 할 얘기는 확대해석이니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나는 확대해석으로 영화를 해부해보겠다. 구조를 맞춰보겠다. 납득할지 안 할지는 당신 마음.
단편 4개가 모여 한 영화를 이룬다. 단편의 이름은 각각 이렇다. 첫 번째 <주문을 외울 날>, 두 번째 <키스왕>, 세 번째 <폭설 후>, 네 번째 <옥희의 영화>. 네 단편에 등장하는 배우는 동일하지만 역할은 다르다. <주문을 외울 날>의 이선균은 감독 겸 강사지만 <키스왕>에서는 학생이다. 문성근도 그렇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는 교수지만 <폭설 후>에서는 감독 겸 강사다. 이런 역할 차이 때문에 영화는 이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네 단편이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이게 꼼수라고 생각한다. 얼핏 보면 다른 얘기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 같은 얘기다. 이들은 서로 연결된다. 왜 그런지 보자. 쉬운 설명을 위해 네 단편의 이름을 기호화하겠다. <주문을 외울 날>을 (A)라고, <키스왕>을 (B)라고, <폭설 후>를 (C)라고, <옥희의 영화>를 (D)라고 하자. (B) 첫 장면은 진구(이선균)와 송 교수(문성근)가 영화 감상을 마친 직후다. 송 교수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끝자막이 멈춘다. (B)의 첫자막에서 나왔던 음악도 멈춘다. 진구와 송 교수가 봤던 영화는 무엇일까? 이야기상 그것은 진구가 과제로 찍은 영화다. 송 교수가 진구의 영화를 보고 끝자막에서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모니터 속 영화도 멈추고 (B)의 오프닝 음악도 멈췄다. (B)의 오프닝 음악은 (A)의 엔딩 음악이기도 하다. 그 오케스트라 음악은 (A)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작해 (B)의 첫자막과 첫 장면까지 이어진다. 그러다가 송 교수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모니터 속 끝자막과 함께 멈춘다. 이는 모니터 속 영화가, 진구와 송 교수가 함께 본 영화가, 진구가 과제로 찍은 영화가 (A)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진구는 <주문을 외울 날>을 찍어 송 교수한테 보여준 것이다. <주문을 외울 날>은 진구의 영화다. "그럼 진구가 자기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는 소리냐?" 이런 말은 하지 말자.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다. 또, 앞서 말했듯이 배우는 같지만 역할이 다른 점은 꼼수다. 네 단편이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홍상수가 꾸민 것이다. 정리하면, (B)의 첫 장면은 진구와 송 교수가 (A)를 다 본 직후다. 송 교수는 진구가 찍어 온 (A)를 보고 칭찬한 것이다.
(B)는 진구와 옥희의 일상이다. (A)가 영화 속 영화라면 (B)는 영화다. (C) 또한 일상이고 영화다. (B)에서 송 교수가 정교수로 나오는데 왜 (C)에서는 강사로 나오느냐고 묻지 마라. 아까 말했듯이 역할 차이는 꼼수다. (C)의 시점은 (B)의 1년 전이다. (C)에서 진구는 애인 있냐고 송 교수에게 묻는다. 송 교수는 답한다.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있어. 근데 잠은 안 잔다." 여기서 송 교수가 사랑하는 사람은 옥희다. 재밌게도 옥희는 이 답변을 듣고 짓궂게 묻는다. "왜 사랑하세요?" 자기를 왜 사랑하는지 알려 달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C)에서 옥희와 송 교수가 사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보다 (C)가 앞선 셈이다. (B)에서 친구가 옥희에게 묻는다. 송 교수랑 잤냐고. 옥희는 술 취해서 한 번 잤다고 말한다. 이 말도 시간 선후를 알려주는데, (C)에서 송 교수가 '잠은 안 잤다'고 말했고 (B)에서 옥희가 한 번 잤다고 말했으니 (B)보다 (C)가 앞선다. (C)에서는 안 잤는데 시간이 지나고 (B) 즈음에서 잔 것이다. (C)가 (B)보다 전이라면 (C)는 1년 전일 수밖에 없다. (B)는 크리스마스 때다. 12월 25일. 이때 종강이었다. (C)는 계절학기이므로 (B)의 1년 전 겨울이 된다. 앞서 살폈듯이 (C)는 (B)보다 나중일 수 없다. (C)에서 옥희와 송 교수는 사귀는 중이고, (B)에서 옥희와 송 교수는 헤어진 상태다. (C)가 겨울 계절학기니 (C)는 (B)보다 1년 전이다. 2년 전도 아니고 왜 1년 전인지를 묻는다면 (D)를 살펴야 한다. (D)에는 두 시점이 공존한다. 옥희의 해설을 들어보자. "하루는 12월 31일이었고 또 하루는 1년이 지나고 다음다음 해 1월 1일이었습니다." 12월 31일은 송 교수와 데이트한 날이고, 1월 1일은 진구와 데이트한 날이다. 전자를 (d1)이라, 후자를 (d2)라 하자. (d1)과 (d1) 사이에는 1년이 존재한다. (d1)이 12월 31일이고 (d2)가 1월 1일이므로 햇수로 치면 3년이다. 우리는 앞서 (C)가 (B)의 전이라고 밝혔다. (B)는 (A) 직후이므로 (A)와 (B)는 붙어 있다. 즉 (C)→(A)(B)가 된다. (C)도 겨울이고 (A)(B)도 겨울이므로 둘 사이에는 최소 1년이 존재한다. (d1)과 (d2)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d2)는 (B) 다음이 확실하다. (d2)에서 옥희는 진구와 사귀는 중이고, (B)에서 옥희는 진구와 사귀기 시작하므로 (B)가 먼저고 (d2)가 다음이다. 즉 (C)→(A)(B)→(d2)가 된다. 이제 (d1)만 해결하면 된다. (d1)에서 옥희와 송 교수는 사귀는 중이다. (B)는 옥희와 송 교수가 헤어진 상태이므로 (d1)은 (B) 전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C) 이전이냐 이후이냐 하는 점이다. (d1)이 (C) 이전이면 (d1)→(C)→(A)(B)→(d2)가 되고, 이후이면 (C)→(d1)→(A)(B)→(d2)가 된다. 해답은 (C)에서 찾을 수 있다. (C)에서 옥희는 송 교수에게 문자를 보낸다. "폭설 후에 너무 갑작스러워진 것 같아요. 저도 힘들어요." 이 말을 통해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폭설 후에 갑작스러워졌다'는 말은 폭설 전에는 사이가 괜찮았다는 뜻이다. (d1)에서 둘 사이가 좋으므로 (d1)이 (C) 전일 확률이 높다. (C)는 결별 직전이지만 (d1)은 잘 사귀고 있는 상태다. 송 교수가 잘생긴 나무 앞에서 이듬해 1월 1일에 만나자고 약속할 때 옥희는 말한다. "우리가 헤어져야 해요?" 송 교수의 사임도 (d1)이 (C)보다 앞선다는 데 한몫한다. 송 교수는 계절학기를 마지막으로 교수직을 관두기로 결심한다. 아마 송 교수의 사임이 결별의 계기가 된 듯하다. (C)가 (d1)보다 앞선다면 결별 뒤 아차산에 갔다는 말이 되므로 (C)는 (d1)보다 전일 수가 없다. (C)는 무조건 (d1)보다 뒤다. 그러므로 전체적 시간 순서는 (d1)→(C)→(A)(B)→(d2)가 된다. (d1)이 12월 31일이므로 (C)는 1월 계절학기가 되고 (A)(B)는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가 된다. (d2)는 이듬해 1월 1일이다. 햇수로 따지면 3년이다. (B)에서 진구가 영화 완성했느냐고 옥희에게 묻는다. 옥희는 자신을 엉터리라 자칭하며 완성 못 했다고 답한다. 여기서 미완성한 영화는 (d1)이다. 옥희는 (d1)을 찍었다가 미완성하고 이듬해 1월 1일에 진구와 데이트한 경험 (d2)를 (d1)에 붙여 (D)를 완성한 것이다. 복잡한데 정리하면 이렇다. 번호는 시간순이다.
  1. 12월 31일, 옥희와 송 교수가 아차산에 놀러 간다. 송 교수는 우리가 헤어지면 이듬해(다음다음 해) 1월 1일에 여기서 만나자고 옥희에게 말한다.
  2. 새해가 밝았다. 폭설이 내린다. 옥희와 송 교수 사이가 멀어진다.
  3. 계절학기가 시작됐다. 송 교수가 학교를 떠나고 옥희와 송 교수가 헤어진다.
  4. 송 교수는 학교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옥희와 송 교수는 어정쩡한 관계를 지속한다.
  5. 그해 겨울, 진구가 과제로 <주문을 외울 날>이란 영화를 찍는다. 송 교수가 그것을 보고 진구를 칭찬한다.
  6. 옥희는 과제를 완성하지 못한다. 진구가 옥희를 지분댄다. 옥희는 송 교수와 헤어졌다 믿고 진구를 받아들인다.
  7. 이듬해 1월 1일, 옥희는 진구와 아차산에 놀러 간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완성한 과제를 완성한다.

그래서 제목이 <옥희의 영화>다. Do you understand?

2. 차이와 반복
홍상수 영화에서 '차이와 반복'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 마지막 해설을 들어보자. "많은 일들이 반복되면서 또 어떤 차이를 가지는 이 인생이라는 게 뭔지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제 손으로 두 그림을 붙여 놓고 보고 싶었습니다." 홍상수는 인생을 탐구하려고 차이와 반복을 성찰한다. 그래서 그가 찍은 영화의 장면들은 비교되고 대조된다. <강원도의 힘>부터 <북촌방향>까지 그러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차이와 반복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거기에는 없었던 듯하다.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과 지숙은 같은 시기에 다른 공간으로 강원도를 여행한다. <오! 수정>에서 재훈과 수정의 기억은 겹치기도 하고 엇갈리기도 한다. <생활의 발견>에서 경수는 청평사 회전문 설화를 반복한다. 그는 공주(선영)의 몸을 감은 뱀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헌준과 문호는 선화를 두고 과거를 공유한다. 그들의 미래는 묘하게 반복된다. <극장전>에서 동수는 영실을 따라다니며 선배 영화를 답습한다. 그의 모방은 차이를 띠며 반복된다. <해변의 여인>에서 중래는 문숙과 선희 사이를 반복한다. 두 여자는 닮았다. 성남이 배회하는 <밤과 낮>의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그렇고, <하하하>도 그렇고, <북촌방향>도 그렇다. 전체 영화가 차이를 띠며 반복되면서 복제된다. 마치 원본 없이 대량생산 되는 시뮬라크르 같다. 혹자는 홍상수 영화가 매번 똑같다며 불평한다. 나는 매번 똑같아도 좋다. 찌질한 군상은 언제 봐도 재밌다.
<옥희의 영화>에서는 (A)와 (B)가 반복되고, (d1)과 (d2)가 반복된다. (A)와 (B)부터 살펴보자. (A)는 진구가 찍은 영화고, (B)는 (A)를 본 뒤 진구한테 벌어지는 얘기다. 자신이 찍은 영화와 자신이 사는 일상이 겹친다.

위는 (A)의 처음이고 아래는 (B)의 마지막이다. 둘은 장소도 동일하다. 차이가 있다면 다음 장면인데, (A)에서 진구는 아내와 사이가 안 좋고 (B)에서 진구는 옥희와 사귄 직후이므로 사이가 좋다.
아내는 진구를 놔두고 혼자 앞서 간다(위). (B)에서 진구와 옥희는 팔짱 끼고 사이좋게 걷는다(아래). 장소는 물론 동일하다.
(A)에서 진구는 오늘 늦게 들어간다고 아내에게 말한다. 아내는 술 마실 거냐며 한 달에 두 번 마시기로 약속하지 않았냐고 말한다. 아내 말에 따르면 진구는 술을 두 번만 마셔야 한다. 이는 (B)에서 그대로 실현된다. (B)에서 진구는 술을 두 번 마신다. 첫 번째 음주는 아차산에서 양순이 몰래 옥희에게 고백한 때고, 두 번째 음주는 식물원에서 옥희와 키스할 때다. 사실 세 번째도 있다. 집 앞에서 옥희를 기다릴 때 진구는 가방에서 술을 꺼내 한 모금 마신다. 이것은 별 의미 없으므로 제외한다(죄송).
(A)에서 진구는 여제자의 시나리오를 검토한다. 그때 여제자의 해설로 시나리오 내용이 설명된다. "새벽인지 창에서부터 뿌연 밝음이 번지고 있을 때 호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남자는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맘을 바꿔서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안기려다 말고 남자를 빤히 쳐다봅니다. 그녀의 표정이 개구쟁이 같아집니다. '나는 목이라서. 난 너무 추워서. 나는 목이라서.' 그녀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나리오 내용은 (B)에서 재현된다. '새벽인지 창에서부터 뿌연 밝음이 번지고 있을 때'는 (B)에서 진구가 옥희를 새벽까지 기다릴 때다. 그때 영화는 인서트컷으로 새벽이 왔음을 알려준다.
시나리오에서 '호텔'은 옥희의 자취방을 뜻한다. '그녀가 맘을 바꿔서 자신을 용서했다'고 하는데, 옥희는 지난밤까지 진구를 거부하다가 다음 날 새벽이 되자 진구를 집으로 들이고 섹스한다. 이는 옥희가 맘을 바꿨다는 뜻이다. 시나리오의 그는 진구고 그녀는 옥희다. "나는 목이라서. 난 너무 추워서. 나는 목이라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시나리오에서 그녀는 맘을 바꿔 그를 찾았을 때 춥다고 말했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춥다는 말이 나왔다. 영화에서도 춥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옥희의 심리와도 연관된다. 식물원에서 진구가 옥희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춥지?" 옥희는 말한다. "여기 안 추운데." 둘이 키스한 뒤 진구는 사랑을 받아 달라며 애원한다. 옥희는 말한다. "모르겠다, 진구야." 옥희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여기 안 추운데."라는 말이 그것을 대신한다. 시나리오에서 그녀가 그를 받아들였을 때 춥다고 말했듯이, 옥희도 추위를 인정해야 진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춥다는 것은 맘을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안 춥다는 것은 맘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이대로라면 옥희가 진구를 집에 들였을 때 춥다는 말이 나왔어야 한다. 그래야 조각이 맞는다. 그때 옥희는 말한다. "춥지?" 진구가 답한다. "어." 옥희가 말한다. "들어올래?" 진구가 답한다. "어. 그럴게." 옥희는 추웠는지 담요를 두르고 나타났다. 춥냐는 물음과 담요를 통해 옥희가 추위를 인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진구의 맘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A)의 시나리오가 (B)의 일상으로 나타났다. 둘은 반복됐다. '나는 목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왜 목인가? 여제자는 '나는 모기라서'라고 발음한다. 모기. 옥희를 발음하면 '오키'가 된다. 모기와 오키. 둘의 발음은 유사하다. "나는 목이라서."라는 말은 "나는 옥희라서."라는 말과 같다. 여제자의 말을 풀이하면 이렇다. "나는 옥희라서. 난 너무 추워서. 나는 옥희라서."
(A)에서 진구는 회식 가기 전에 벤치에 앉아 시간을 허송한다(위). (B)에서 진구는 영화제 가기 전에 벤치에 앉아 시간을 허송한다(아래). (A)에서 진구는 여제자를 바람맞힌다. (B)에서 진구는 옥희에게 바람맞는다. 옥희를 보고 싶어 전화하지만 옥희는 전화를 꺼 놓았다. 주머니에 손 넣고 전화하는 자세까지 비슷하다. 두 장면 모두 가방이 옆에 놓여 있다.
진구는 (A)와 (B)에서 소문에 시달린다. 소문 때문에 곤욕을 치른다. (A)에서 GV 때 한 관객이 일전에 여제자랑 사귀지 않았냐고 묻는다. 진구는 자기가 유부남이며 다른 여자와 사귄 적 없다고 말한다. 관객은 묻는다. "기억나세요? 4년쯤 됐는데." 진구는 답한다. "예. 기억 안 납니다." 진구의 답변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그는 끝까지 부정한다. 나중에 화까지 낸다. (B)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진구는 친구를 통해 영화제에서 상 탄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는 소문으로 퍼져 만나는 친구마다 진구를 축하한다. (A)에서 소문 때문에 진구가 화를 냈듯이, (B)에서 진구는 상을 못 받고 소문은 거짓이 되어 진구는 삐쳐서 혼자 집에 가다 전화를 받고 친구한테 화를 낸다. 식물원에서 옥희와 키스했을 때 옥희가 묻는다. "너 정말 아무랑도 사귄 적 없어?" 진구가 답한다. "어. 나 정말 처음이야." 옥희의 물음은 (A)에서 관객이 한 질문과 동일하고, 진구의 대답은 (A)에서 진구가 한 답변과 동일하다. '여제자와 사귄 적 있어?'와 '아무랑도 사귄 적 없어?'가 같고, '기억 안 난다.'와 '정말 처음이야.'가 같다.
(D)에서 나온 차이와 반복을 살펴보자. (D)는 주제 자체가 차이와 반복이므로 설명이 불필요하다. 옥희가 친절하게 차이점을 해설하기 때문이다. 특징적인 것만 보고 넘어가자.
아차산 입구에서 사슴 모형을 볼 때 (d1)에서는 그들이 사슴을 올려다보고, (d2)에서는 사슴이 그들을 내려다본다.
산을 오를 때 남자의 행동은 반복되지만 위치는 차별된다. (d1)에서 남자는 왼쪽에 있고 (d2)에서 남자는 오른쪽에 있다.
영화와 일상 그리고 두 경험이 차이를 띠며 반복된다. 우리가 사는 삶도 마찬가지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희망을 품고 새로운 미래를 그리지만 결과는 뻔하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듯이 현실 속에 새로운 일상은 없다. 우리는 찌질함을 반복할 운명을 타고났다. 속물들이 반복을 거듭한다니 무섭지 않은가? 홍상수 영화는 웃기고도 끔찍하다.

3. 장면과 서사 분석
(A)에서 진구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남자다. 출근할 때 아내가 두 약속을 거론한다. 담배 끊겠다는 약속과 술은 한 달에 두 번 마시겠다는 약속. 진구는 두 약속 모두 어긴다. 여제자에게 인사동에서 술 사주기로 한 약속도 어긴다. (B)에서 섹스한 뒤 옥희는 말한다. "난 네가 착해서 좋아. 믿을 수가 있어." 과연 그럴까? 진구는 믿을 만한 남자가 아니다.
시나리오를 읽고 진구는 여제자에게 가르침을 준다. 그것은 창작에 관한 교훈으로서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껏 홍상수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 중 최고다. 보물이나 다름없다. 홍상수는 진구를 통해 창작의 방법을 설파했다. 요는 인위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대부분 학생이나 예술가가 창작할 때 보면 풀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놔두면 이야기가 흘러가고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착각이자 잘못이다. 창작의 과정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다. 자연스러움은 창작의 결과다. 결과가 자연스러워야지 과정이 자연스러우면 안 된다. 과정은 튼튼하고 빡빡해야 한다.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창작은 구조를 구축하는 행위이므로 치밀하고 섬세해야 한다. 가카의 꼼꼼함이 필수다. 진구는 무위가 아닌 인위를 역설하는데, 인위가 바로 구조다. 구조는 인위로 쌓는 것이지 무위로 쌓는 것이 아니다. 무위로는 쌓이지 않는다. 구조가 건축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풀어버리면 이야기와 아이디어는 산으로 간다. 구조에 통합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져 작품은 힘을 상실한다. 진구의 말처럼, 전체에 힘이 달린다,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믿는다. 또 그게 창작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망상이요, 헛소리다. 훌륭한 작품일수록 통제되고 집약되고 절제된 부분이 많다. 거장은 이야기를 풀어버리지 않는다. 깍고 다듬어서 뼈대에 살을 붙이듯 구조에 껴입힌다. 창작은 그런 인위를 통해 자연스러움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자연스러움은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다. 창작은 통제되어야 하고, 창작자는 통제해야 한다. 뭐든지 그냥 하는 것은 없다. 다 이유가 있고 근거가 있기에 창작되었다. 비합리적인 세상에서 합리적인 세상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창작이다. 때문에 좋은 작품일수록 분석과 비평이 잘된다. 좋은 작품은 구조에 따라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건축됐으므로. 논리 없는 글이 잘 쓴 글인가? 창작도 마찬가지다. 힘을 들여야 가짜가 빠지고 진짜가 살아남는다는 말, 창작자는 유념해야 한다.
교수실에서 진구는 송 교수와 대화를 나눈다. 송 교수의 한탄을 통해 홍상수가 영화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송 교수는 말한다. 돈이 영화판을 망쳤다고. 영화에서 예술은 끝났다고. 남 선생(진구) 같은 사람 이제 영화 못 만든다고 하는데, 이는 홍상수가 자신한테 하는 말이다. 홍상수처럼 예술영화 만드는 사람은 이제 영화 찍기 힘들다. 영화도 돈벌이가 되어버렸다. 해결책은 책이다. 송 교수는 말한다. "책이나 읽읍시다. 세상이 이렇게 썩어버리면 우리는 책으로 들어가는 거야. 책뿐이 없어." 홍상수 영화를 보면 책 얘기가 종종 나오는데, 홍상수는 책을 많이 읽는 듯하다.
이발소에서 진구는 '영수'가 누구인지 고민한다. 출근할 때 아내가 진구를 영수라고 잘못 불렀다. 영수가 누구냐고 묻자 아내는 고등학교 친구라고 둘러댄다. 여기서 '영수'는 송 교수다. 그렇다고 아내가 송 교수랑 사귄다는 뜻은 아니다. (A)는 어디까지나 진구의 영화다. (B)에서 보면 옥희가 송 교수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좀 좋아했거든." 옥희는 송 교수를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다. 아내가 말한 영수는 고등학생 때 친구다. '고등학교'라는 설정이 겹치면서 영수는 송 교수가 된다. 실제로 (A)에서 진구는 송 교수를 사촌 형 영수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진구가 자신이 찍은 영화 (A)에 영수 얘기를 넣은 이유는 옥희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찍은) 영화에서 사촌 형 영수와 사귈지도 모른다고 아내를 의심했듯이, 현실에서도 옥희와 송 교수가 사귈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것이다. 내가 '의심했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진구가 영화를 찍은 (A)의 시점이 (B)보다 과거이기 때문이다. 진구는 옥희와 사귀기 전부터, 옥희를 따라다닐 때부터 옥희와 송 교수의 관계를 의심했던 것이다. 그 의심이 영화에 발현돼 '영수'가 되었다. (B)에서 진구가 송 교수님 방에 왜 서 있었냐고 옥희에게 묻는데, 이 물음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벤치에서 낮잠을 잘 때 한 여자가 몰래 사진을 찍는다. 진구는 잠을 깨고 여자와 대화를 나눈다. 여자는 자기 카메라가 나이콘(nikon)이라고 말한다. 진구는 웃으면서 나이콘이 아니라 니콘이라고 정정한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잘못된 발음이 아니라 진구가 신은 신발이다. 나이콘과 발음이 비슷한 나이키(nike). 니콘은 잘못 발음되면 나이콘이 되지만, 나이키는 잘못 발음되면 니케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상품이란 물건 실체가 아니라 이름값이다. 우리는 이름을 사는 거지 물건을 사는 게 아니다. 진구는 남편 있냐고 여자에게 묻는다. 여자는 있다고 답한다. 그때부터 진구의 태도가 차가워진다. 여자는 무슨 영화를 찍느냐고 묻지만 진구는 카메라에 찍힌 자기 사진만 지우고 가버린다. 여자가 미혼녀였다면 진구는 지분댔을 것이다.
중국집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권력 관계가 엿보인다. 송 교수가 앞장서고 선생들이 줄줄이 뒤따른다. 진구는 맨 뒤에서 그들을 쫓는다. 그들이 빨리 오르자 진구는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왜 이렇게 빨리 올라가는 거야?' 이유는 하나. 선생들은 송 교수를 놓치지 않으려고 줄 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집 화장실에서 진구는 송 교수가 어떤 사람이냐고 방 선생에게 묻는다. 방 선생은 송 교수가 사심 없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답한다. 그에 따르면 송 교수는 깨끗하다. 식사 자리에서 진구는 소문 얘기를 꺼낸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고 돈 받은 일이 사실인지 송 교수에게 묻는다. 분위기가 어색해지고 험악해진다. 진구는 무안해서 일부러 더 캐묻는다. "아니, 저는 그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겁니까, 요새? 저는 정말 클리어(clear)하게…." '클리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해변의 여인>에서도 등장한다. 아마 '클리어'는 홍상수의 말버릇인 듯하다. 여기서 클리어는 사심 없고 깨끗하다는 송 교수에 대한 평가와 연관된다. 클리어도 깨끗하다는 뜻 아닌가. 진구가 자꾸 묻자 송 교수는 화를 낸다. "이게 완전히 똥물 튀김이라니까." 여기서는 '똥물'이 나오면서 깨끗함과 대조를 이룬다. 송 교수는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똥물처럼 더럽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GV에서 진구는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한 관객이 진구가 여제자와 사귀었고, 그 여제자가 자기 친구였으며, 그녀는 진구와 헤어진 뒤 폐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진구는 소문을 부정한다. 마지막 대사가 의미심장하다.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 영화 보여주려고 만든 거 아니에요." 당신처럼 소문 퍼뜨리는 사람을 위해 영화 만든 게 아니라는 뜻이다. 홍상수는 그동안 불륜 얘기를 많이 해왔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이런 저런 소문을 퍼뜨렸다. 홍상수가 여제자와 사귀었다는 둥, 여행 다니면서 바람을 피웠다는 둥, 스승의 아내와 잤다는 둥. 소문에 시달린 홍상수는 진구를 통해 일침을 날렸다. "당신 같은 사람들한테 영화 보여주려고 만든 거 아니에요." 뜬소문 퍼뜨리지 말라는 홍상수의 경고다.
(B)에서 옥희와 진구와 송 교수는 한 장면에 함께하는 법이 없다. 셋은 삼각관계다. 옥희를 두고 두 남자가 경쟁하는데, 송 교수는 떠나는 자고 진구는 다가오는 자다. 이런 관계에 맞게 세 인물이 등장하고 퇴장한다. 처음에 진구와 송 교수가 편집실에서 (A)를 보고 있다. 송 교수는 진구를 칭찬한 뒤 화면 밖으로 나간다. 다음 장면은 편집실 복도다. 송 교수가 편집실을 나오고 옥희와 마주친다. 그때 옥희가 화면에 들어온다. 이때 진구는 없다. 그는 편집실에 남아 있다. 송 교수는 옥희와 대화한 뒤 화면 밖으로 나간다. 옥희는 송 교수를 뒤따라가 방문에 귀를 갖다댄다. 진구가 말을 건다. 카메라가 줌아웃(zoom-out) 하면서 옥희와 진구를 함께 잡는다. 이때 송 교수는 없다. 화면에는 항상 둘만 잡힌다. 옥희와 송 교수 아니면 옥희와 진구 아니면 진구와 송 교수. 학교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옥희와 송 교수가 골목을 걷는다. 옥희는 송 교수 보고 먼저 들어가라고 한다. 송 교수는 술 마시지 말라는 말을 남긴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다음 장면에서 송 교수가 화면으로 들어오고 진구가 인사를 한다. 편집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송 교수는 화면 밖으로 나간다. 이때 옥희가 걸어오고 카메라는 패닝 해 옥희와 진구를 함께 잡는다. 이 시퀀스에서도 셋은 함께하는 법이 없다. 화면에는 항상 둘만 존재한다. 송 교수는 늘 떠나고 진구는 늘 다가온다. 이는 삼각관계의 결말과 일치한다.
식물원에서 키스할 때, 옥희는 진구가 마시던 술을 마신다. 그 술은 '처음처럼'이다. 옥희가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진구가 말한다. "이런 느낌 처음이야." 센스 작렬! 홍상수는 언어유희의 대가다.
옥희와 진구는 섹스한 뒤 대화를 나눈다. 옥희는 진구가 착해서 좋다고 말한다. 진구는 착해지겠다고 답한다. 이는 착하게 살라는 홍상수의 메시지다. <북촌방향>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나온다. 옥희가 섹스하니까 좋냐고 묻는다. 진구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부끄러워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도 부끄러웠다. 나도 애인에게 그런 소리를 들은 듯하다. "섹스하니까 좋아?" 이 물음에 당당하게 대답할 남자가 몇이나 될까?
(C)에서 칠판에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영원한 수수께끼. 그대 여자의 마음…." 위 장면을 보면 그 말이 송 교수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폭설이 있은 후 옥희와 송 교수 사이는 멀어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렇다(폭설 후 갑작스러워졌다는 옥희의 문자). 송 교수는 옥희의 마음 상태가 궁금했을 테다. '그대 여자의 마음'에서 '그대'는 옥희다. 나중에 진구와 옥희가 교실에 당도했을 때 송 교수는 칠판을 지운다. 카메라는 빈 칠판을 오래 보여준다. 이는 송 교수가 마음에서 옥희를 지웠다는 뜻이다. 송 교수는 사임과 동시에 결별도 결심했다.
"괜히 비싼 걸 먹는다고 낚지를 먹었는데 완전히 체했다." 송 교수가 음식점을 나오면서 한 해설이다. '낚지'는 '비싼 거'다. 그는 골목에서 낙지를 토한다. 그리고 해설이 이어진다. "아이 시원하다. 속 시원해. 그만둔 것 잘했어. 이게 맞는 거야. 난 자격 없어." 그는 낙지를 토한 것과 교수직을 관둔 것을 동일시했다. 낙지는 비싼 거이므로 교수직과도 상통한다. 그가 토한 것은 교수직에 대한 권위와 허위였고, 그는 그래서 속 시원해졌다.

4. 강원도의 힘
여러모로 <강원도의 힘>과 유사한 점이 많다. 둘 다 여제자와 불륜한 내용이 주다. <옥희의 영화>에서 방 선생은 송 교수에게 조니워커 블루를 대접하는데, <강원도의 힘>에서 상권이 김 교수에게 선물한 술도 조니워커 블루다. <옥희의 영화>에서 오 교수는 송 교수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송 선생이 애들하고 술 마시고 다니면 안 돼요. 애들이 너무 편하게 생각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에요." <강원도의 힘>에서 춘천대 교수가 상권에게 말한다. "조 선생 맨날 말이야 학생들하고 술 마시고 그러니까 학생들이 보고 싶어 하지." 지숙과 상권이 따로 강원도를 여행했을 때, 지숙 일행은 산을 오르지 못하고 상권 일행은 산 정상까지 오른다.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송 교수와 아차산에 갔을 때 그들은 잘생긴 나무에서 더 오르지 않고 산을 내려가고, 옥희가 진구와 아차산에 갔을 때 그들은 잘생긴 나무에서 산을 더 오른다. 두 영화 모두 한쪽은 내려가고 다른 쪽은 올라간다. 앞서 니콘 카메라 얘기를 했다. 사진 찍던 여자는 니콘을 나이콘이라 발음했다. <강원도의 힘>에서도 '나이콘'이 등장한다. 지숙 친구는 카메라를 잃어버려 경찰에게 말하는데, 니콘을 나이콘이라 발음한다.
여배우도 비교된다. <옥희의 영화>의 여배우는 정유미고, <강원도의 힘>의 여배우는 오윤홍이다. 둘 다 아담하고 소녀스럽다. <옥희의 영화>에서 옥희가 진구와 아차산에 놀러 갔을 때 진구가 말한다. "넌 오래 살 거야. 너처럼 비실대는 애들이 오히려 오래 산다니까." 옥희는 비실대고 연약한 여자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강원도의 힘>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지숙(오윤홍)이 목욕탕에서 체중을 재는 장면이다. 그녀는 40kg 남짓하다. 40kg라면 마르고 연약한 편이다. 그녀는 비실대는 옥희와 닮았다. 체형과 몸무게까지 비슷하다. '비실댄다'는 말로 미루어 옥희도 40kg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소녀처럼 마르고 연약한 여자가 홍상수의 페르소나다. 생각해보니 <강원도의 힘>의 오윤홍, <오! 수정>의 이은주, <밤과 낮>의 박은혜, <옥희의 영화>의 정유미, 이번에 찍은 <다른 나라에서>의 위자벨 위페르까지, 그녀들은 모두 소녀스럽다.

잡말: 명대사 "요즘 뭐 전 국민이 사진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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